국민의힘의 후보 단일화 작업이 우여곡절 끝에 김문수 후보를 대선 후보로 확정하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민의힘은 보수 정당의 존재 기반을 상실한 모습을 보였다. 철학, 신뢰, 지도부의 정치력, 민주적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에서 공당의 품격을 무너뜨렸다.

지난 10일 대선 후보 재선출 후보 등록을 받는 과정은 세계 정당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다. 새벽 3시부터 단 1시간만 후보 등록 기간으로 정해놓고, 한덕수 전 총리가 새벽 3시30분에 입당한 뒤 모두 32가지에 이르는 후보 등록 서류를 제출해 단독 후보가 됐다. “공산당도 이렇게는 안 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당 지도부가 당원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이런 식으로 오만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 한 전 총리로의 단일화에 기울었던 당원들이 후보 교체를 부결시킨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번 단일화 막장극으로 국민적 감동을 살 수 있는 이벤트를 지지율 추락의 대형 악재로 만들고 말았다. 당연히 권영세 혼자 책임지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사태는 김문수 후보의 후보 지위를 복원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으나, 김 후보 역시 중요한 것을 잃었다. 그는 경선 기간에 “한 후보와 경선 직후 단일화를 하겠다”는 말을 22번이나 했다. 김 후보가 1차 경선 선두인 한동훈 후보를 제치고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국민의힘 의원과 당원들이 그의 이런 단일화 의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후보는 막상 후보가 되자 태도가 180도 돌변했다. 이런저런 무리한 이유를 대며 “강제 단일화에 응할 수 없다”고 하더니, 급기야 당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갔다. 청렴, 대쪽 이미지는 사욕과 아집으로 바뀌었다. 이런 치명적 신뢰 상실을 어떻게 회복할 건가.

국민의힘은 현재 온 힘을 모아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대적하기 힘든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다. 그러나 김 후보는 물론 경선 탈락자들 사이에서도 멸사봉공, 자기희생, 책임의식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선에서 탈락했다고 바로 탈당하고, 선대위 참여도 회피하는 등 소인배 정치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당 안팎에선 이번 대선보다는 차기 당권 싸움에 더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지도자와 철학의 부재, 무능이 겹쳐 영국 보수당은 지난해 7월 총선에서 창당 이후 190년 만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국민의힘 역시 보수당과 비슷한 이유로 지난해 4·10 총선에서 궤멸적 참패를 당했다. 이번 대선 준비 과정을 보면 국민의힘의 바닥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