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익명 단톡방서 만난 진심
“시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 실명이 꼭 필요할까?”

이 질문에서 경기 과천시의 변화는 시작됐다.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과천시는 인구가 8만여 명인 소도시다. 작지만 밀도 높은 시민 참여와 자긍심으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한 유일한 도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다. 행정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뜨거운 도시이기에 시민 한 명 한 명의 의견을 빠르게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창구 마련이 절실했다.

그래서 2023년 3월, 과천시는 전국 최초로 실명이 아니라 익명으로 민원을 제기할 수 있는 ‘정책 소통 단톡방’을 개설했다. 시민 누구나 별도의 인증 없이 들어와 생활 불편이나 정책 제안을 자유롭게 게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내부 반발도 있었다. “민원실, 국민신문고 등 민원 공식 창구가 있는데 왜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민원을 처리해야 하느냐”는 우려가 컸다. 심지어 “민원이 더 폭증해 공무가 마비될 것”이라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유익한 말은 실명을 가리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결국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내용의 진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수가 지켜보는 열린 공간에서는 시민 스스로 무분별한 민원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놀랍게도 시행 이후 민원이 오히려 줄었다. 시민 제안을 반영한 정책도 실제로 실행에 옮겨졌다. 난임 부부 소득제한 폐지, 다자녀 기준 완화 등 시민 중심의 따뜻한 정책들이 이어졌다. 도로 포트홀, 가로등 고장, 불법 주정차 같은 생활민원도 평균 1주일 내외면 처리된다. 국민신문고 법정 처리일인 14일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특히 겨울철 제설이나 장마철 자연재난에는 초기에 신속한 대응이 중요한데,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과천시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고 있다. 서울 강동구는 최근 ‘구청장과 톡톡’이라는 오픈채팅방을 통해 직원들과 정책 소통을 하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시는 시민과 공무원이 함께 정책을 설계하는 ‘오픈 디사이드(Open Decide)’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모두 소통의 길을 연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이 단톡방을 운영하면서 고사성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자주 떠올린다. 민원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름을 밝히는 것이 때로는 불이익이나 불편으로 이어질까 망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익명이라면 용기를 낼 수 있다. 목소리 속에 담긴 불편함은 해결이 더 절실한 시민의 목소리일 수 있다. 시민이 원하는 바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그에 따라 사업을 조정하거나 사업 효과를 극대화하는 선순환 행정이 가능해졌다.

“귀를 기울이면 길이 보인다.” 민주주의는 결국 대화에서 출발한다. 실명 없이 시작된 단톡방이 과천을 더 나은 도시로 바꾸는 데 작은 불씨가 되길 바란다. 때로는 이름 없는 목소리에서 가장 진심 어린 변화가 시작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