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재민가요…일상의 기적, 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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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홍 할머니의 기부가 아름다운 이유는 고된 삶으로 일궈낸 전부를 타인에게 남겨서다.
그는 평생 공장 일과 노점 일을 해가며 재산을 모았다. 치매에 걸려 고생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좀처럼 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다, 동네 경로당 봉사로 희망을 찾았다. 유산 기부를 약정한 홍 할머니는 더 먼저 떠난 외동딸 곁으로 지난해 5월 90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홍 할머니의 집을 판매한 7억1000만원을 한부모가정과 소년·소녀 가장 등 취약 계층을 위해 쓰기로 했다.
기부는 로마 시대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국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개인 재산을 정부에 헌납했고 수도와 도로, 건물을 짓는 걸 보람으로 삼았다.
기부 문화는 19세기 미국에서 보편화했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기부로 미국엔 3000개의 도서관이 지어져 교육과 과학, 문화, 예술의 꽃을 피웠다.
한동안 존경받는 자의 의무로 여겨졌던 기부는 이제 10명 중 6명이 참여(2023년 성인 기부율 59.8%)할 정도로 널리 퍼졌다. 기부자들은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또는 종교적 신념으로 기꺼이 나눔을 실천한다. 홍 할머니처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그 자체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기부자도 많다.
퍼네이션(fun+donation)도 확산하고 있다. 뛴 거리에 따라 기부하는 ‘기부런’이 대표적이다. 기부를 통해 탄생, 입학과 졸업, 결혼 등 삶의 중요한 궤적을 기록한다. 연예인 ‘기부 천사’로 알려진 가수 션(52)은 “결혼할 때 느낀 행복감을 세상과 나누려 기부하다 보니 어느새 기부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기부는 평생의 행복을 완성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1㎞ 달리면 500원 후원…생일선물 대신 기부금 내줄래?
일상에서 실천하는 '이색 기부'

달땜크루는 전국에 회원 120여 명을 뒀다. 이들은 매월 열흘간을 ‘달림주간’으로 정해 지역별로 공원 등에 모여 뛴다. 한 사람당 뛴 거리 1㎞에 100~500원씩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모인 돈은 보육시설 등 어려운 이웃에게 수시로 전달한다. 송씨는 “기부할수록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몸도 건강해지니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달땜크루가 그동안 기부한 금액은 3000만원이 넘는다.
뛴 거리 만큼 쌓인 마음, 건강도 챙긴다
기부런 인기는 러닝 열풍과 함께 치솟고 있다. 인스타그램, X(옛 트위터) 등에는 기부 인증 릴레이 글이 수두룩하다. 인스타그램에 ‘기부런’을 태그한 게시물만 5만여 개다.
기부단체도 기부런에 동참한다. 월드비전 ‘글로벌 6k’ 기부런이 대표적이다. 6k는 개발도상국 아이들이 식수를 얻기 위해 이동해야 하는 평균 거리(6㎞)를 의미한다. 6k 기부런 참가자는 달린 거리만큼 일정 기부금을 내고, 이 돈은 아이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고 위생을 개선하는 데 쓰인다. 탄소중립을 위한 기부런(부천 기부런 마라톤대회), 장애인을 위한 기부런(승가원) 등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생일 파티 기부부터 자선 축구경기까지…
대학생 김중황 씨(26)는 재작년부터 생일 ‘기부 파티’를 열고 있다. 지인을 초대해 생일 선물 대신 기부금을 내달라고 부탁하는 식이다.
작년 11월 16일 생일엔 서울 안국역 근처 한 카페를 빌려 2회 기부 파티를 열었다. 지인 30명에게 걷은 80만원을 국제 의료구호 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에 전했다. 김씨는 “요즘 젊은 세대는 생일에 기프티콘을 주고받는 일이 흔한데 필요 없는 선물을 받는 경우가 많다”며 “선물 비용을 더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어 파티를 기획했고, 점점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기부 생일 파티엔 엠마 캠벨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총장도 참석했다.
유명인만 하던 자선 스포츠 행사를 여는 일반인도 있다. 직장인 이수빈 씨(26)는 지난해 10월 9일 자신이 활동하는 사회초년생 봉사단체 ‘연봉인상(연마다 봉사를 늘린다)’ 회원들과 함께 자선 축구 경기를 했다. 빠니보틀, 심으뜸 등 유명 인플루언서에게 취지를 설명해 선수로 뛰게 하고, 다양한 기업 후원도 유치했다. 이렇게 모은 후원금 1200만원을 시각장애 아동을 위한 점자 교구를 제작하는 사회적 기업에 전달했다. 그는 “운영진들과 함께 기획한 선한 행사가 점점 커지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했다.
‘아프리카에 염소 보내기’ 이색 기부
독특한 동물 기부도 있다. 세계적 아동권리 후원 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은 2010년부터 ‘아프리카에 빨간 염소 보내기’ 캠페인을 벌였다. 지금까지 니제르 우간다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3개국 취약계층에 염소 2만8643마리를 나눠줬다.
빨간 염소는 아프리카의 척박한 환경에서 적은 물과 먹이로도 잘 자라 빈곤 가정에 요긴한 수익원이 된다. 마리당 하루 5L 생산되는 염소젖으로 아이들에게 영양을 공급할 수 있다. 빨간 염소 후원금은 염소 구매뿐만 아니라 목축 교육, 사육 환경 조성 등에도 쓰인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염소를 받은 주민의 생생한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후원자들과 적극 공유한다. 이 캠페인이 후원자들에게도 특별한 기쁨을 선사하는 이유다. 래퍼 원슈타인, 뇌과학자 정재승 박사도 빨간 염소 홍보맨으로 나서 동참을 권유했다. 박서영 세이브더칠드런 매니저는 “염소를 받은 주민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 같은 분위기를 내곤 한다”며 “기부에 동참하면 행복한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벅차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원증 대면 1000원 기부! 삼성전자 '나눔 키오스크'
IT로 편리해진 기부
기부를 더 편리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정보기술(IT)이다. 기업의 키오스크 기부, 유명인의 좋아요 기부보다 손쉬운 방법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내가 기부한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 블록체인 기술로 검증할 수도 있다. 게임 기부는 재미와 기부를 결합한 대표적 ‘퍼네이션’ 사례다.회사원이 사원증이나 교통카드를 태그하면 자동으로 일정 금액이 기부되는 키오스크 기부 사례가 종종 보인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하철역과 사내 주요 지점에 설치돼 시민과 임직원이 쉽게 기부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사내 설치한 ‘나눔 키오스크’와 ‘천원의 기적’을 5년째 운영해 왔다. 키오스크에 사원증을 대면 급여공제를 통해 취약계층 아동에게 1000원이 자동 기부된다.
게임을 활용한 이색 기부도 많다. 게임사가 후원 단체와 제휴해 이용자가 특정 아이템을 구매하면 그 금액만큼 기부금으로 전달되는 방식이다.
게임사가 직접 ‘게임화한 기부’에 나선 사례도 있다. 스마일게이트에서 기부와 사회공헌 사업을 담당하는 희망스튜디오는 게임을 최대한 빨리 깨는 것을 목표로 하는 ‘스피드런’ 행사를 연다. 이 대회를 인터넷 플랫폼으로 생중계하며 시청자의 방송 후원금으로 기부금을 마련한다. 서울 문래동 올댓마인드에서 23일부터 오는 26일까지 열리는 이번 행사에서 모인 기부금은 난치병 아동과 가족을 위한 심리·정서 치료에 활용할 예정이다. 권연주 스마일게이트 희망스튜디오 이사는 “게임에서 느끼는 성취감을 기부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면 기부도 게임처럼 더 재미있게 활성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IT를 통해 기부 투명성도 높일 수 있다. 2019년 12월 문을 연 기부 플랫폼 체리는 기부자 관심에 맞게 후원 캠페인을 추천하고, 간편결제를 활용해 기부를 도와준다. 기부금 정보를 블록체인으로 검증하고,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체리를 통한 기부금액은 180억원, 기부 횟수는 53만 건에 달한다. 이수정 체리 대표는 “체리를 활용하면 누구나 쉽게 재미있고 투명한 기부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눔은 마라톤 같아…뛰다 보니 많은 이들이 함께하더라"
'선한 영향력' 가수 션

최근 몇 달은 특히 숨 가빴다. 1월 초 션은 제주도에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올 한 해 예정된 ‘기부런’에 대비해 기초 체력을 다지기 위해서다. 20일엔 국가유공자 후손을 위한 집짓기 프로젝트의 열아홉 번째 주택 완공 현장을 찾았다. 무엇보다 그는 오는 3월 경기 용인시에서 개관을 앞둔 ‘승일희망요양병원’의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국내 최초 루게릭병 환자 전문 요양병원인 승일희망요양병원은 그의 숙원 사업이다. 루게릭병을 앓다가 지난해 9월 작고한 전 프로농구 선수 박승일 씨와의 오랜 약속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21일 서울 한남동에서 만난 션은 “비록 완공을 못 보고 떠났지만, 승일이는 누구보다 이 소식에 기뻐했을 것”이라며 “친구야 고맙다”고 말했다.
힙합 가수 션, 농구선수 박승일과 만나다
승일희망요양병원은 루게릭병 환자 맞춤형 요양병원이다. 션이 공동대표로 있는 승일희망재단에서 세웠다. 사람 몸집만 한 유리 창문으로 꾸민 외관이 눈에 띈다. 입이 아니라 눈빛으로 소통하는 루게릭병 환자의 눈동자를 형상화한 디자인이다. 침상에 누운 환자들이 쉽게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도록 돕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지상 6층 규모로 조성된 요양병원에는 환자 70여 명이 들어올 예정이다. 병원 곳곳엔 환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모든 시설에 침상이 드나들 수 있도록 넉넉한 동선을 확보했다. 온풍기 대신 바닥 난방 시스템을 도입한 건 호흡기 질환 합병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천장의 작은 조명 하나까지도 자연광에 가까운 조도를 연출했다. 일상 대부분을 누워서 보내야 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다.
션의 이야기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 지인의 추천으로 박씨가 펴낸 책 <눈으로 희망을 쓰다>(2009)를 읽으면서다. 션은 곧장 그가 있는 집을 찾았다. 박씨의 소원이던 루게릭병 환자 전문 요양병원 설립에 보태기 위해 그동안 모은 1억원을 수표로 뽑아갔다.
거동이 불편했던 박씨와는 글자판으로 소통했다. 션이 글자가 적힌 화면을 가리키면 박씨가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어찌 보면 루게릭병은 희망이 없는 병이잖아요.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난처한 상황이었죠. 그때 승일이가 건넨 한마디가 분위기를 유쾌하게 반전시켰습니다.” 글자판엔 ‘우리 친구 하자’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35만 명이 함께 완주한 승일희망병원
요양병원 설립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털어 넣은 사재는 턱없이 부족했다. 2014년 국내 연예인 중 최초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하며 루게릭병 환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이듬해 ‘미라클 365런’을 열며 후원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2018년 용인에 대지를 마련했다. 션은 “승일희망재단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1원도 받지 않고 무급으로 일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건설 비용이 뛰어 한 차례 위기를 겪기도 했다. “병원 설립을 위한 행정 절차를 밟으며 기다리던 중이었죠. 그사이 자재비와 운송비가 예기치 않게 올라 80억원가량이 모자라게 됐어요. ‘이젠 끝이구나’ 할 정도로 막막했습니다.”
이때 힘이 돼준 건 정부와 시민, 기업 등 각급 단체의 지원이었다.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한 120억원은 병원이 첫 삽을 뜰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각종 기부런과 후원에 참여한 시민은 약 35만 명. 여기에 20억원 정도가 모자라던 마지막 순간 온라인게임 업체 네오플에서 손을 건넸다. 총액 239억원이 모인 순간이다.
“저한테 나눔은 마치 마라톤 같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뛰는 줄 알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발을 맞춰주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 덕분에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기부 천사’보다 가수이자 남편으로
올해로 52세를 맞은 션의 일과는 새벽 4시에 일어나 20㎞를 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근력 운동과 자전거 타기를 거르지 않지만, 길게는 81.5㎞에 이르는 그의 기부런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면서 뛰는지 묻자 그는 “지금의 나보다 힘겨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버틴다”고 답했다.
‘기부 천사’보다는 가수 션이자 정혜영의 남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 드물게 나서는 이유도 “내가 하는 일에 조용히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1997년 지누션으로 데뷔한 그는 어느덧 음악 활동 27년 차를 맞은 베테랑 가수다. “지누와 새로운 음반에 대한 얘기를 마쳤고, 이른 시일 내 팬들을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립후손' 집 짓기…5년째 81.5㎞ 달렸다
션의 20년 기부 릴레이

지난 21일 서울 한남동에서 만난 션은 기부를 처음 시작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션이 꼽은 ‘인생 최대 행복’의 순간은 2004년 배우 정혜영 씨와 결혼했을 때다. 일상에서의 소박한 나눔으로 시작했다. 1년간 아내와 매일 1만원씩 모으고, 이듬해 결혼기념일에 이를 기부하며 노숙인 무료급식 봉사를 시작했다. 2008년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로 나선 건 첫째 아이를 갖고 얼마 뒤다. 저소득층 아이들 100명을 지원하는 ‘꿈과희망지원’ 사업, 어린이재활병원 건립 모금 ‘만원의 기적’ 캠페인 등도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에서 비롯했다.
달리기를 시작한 건 2011년 희소병을 앓는 박은총 양을 만나면서다. 아이한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며 아이를 데리고 마라톤에 나선 박양의 아버지를 응원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션도 유모차를 끌고 박양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이색 기부’는 계속됐다. 2014년 국내 연예인으로는 처음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참여했고, 2018년과 2023년에도 이어갔다.
그는 2020년부터 국가유공자 후손을 위한 ‘815 런’(사진)에 참여해 매년 81.5㎞를 달린다. 첫해 3000명이던 참가자가 지난해 1만6300명까지 늘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 후손들이 어렵게 산다는 소식을 듣고 안락한 집 한 채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안정훈/김다빈/정희원/안시욱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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