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루이스 고시오 '진정한 사랑은 결국 당신을 찾을 것이다', 2021. /사진제공=부산현대미술관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 '진정한 사랑은 결국 당신을 찾을 것이다', 2021. /사진제공=부산현대미술관
미술관은 조화롭지 못한 공간이다. 정숙한 분위기 속 벽에 걸린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 대다수가 젊은 비장애인이란 점에서다. 나이 든 관람객은 만나기 어렵고, 휠체어나 안내견은 더욱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회화와 조각, 사진, 미디어아트로 대표되는 미술이 ‘시각예술(Visual arts)’에 속하기 때문이다. ‘보는 감각’을 담보하지 않았다면, 관람은 어려워진다. 감각의 장벽은 곧 진입의 장벽이 되고, 전시장은 자연스럽게 일부만을 위한 공간이 된다.

‘모두를 위한 미술’이 가능할까.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느낄 기회조차 박탈당한 건 아닐까. 부산 하단동 을숙도에 자리잡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열 개의 눈’은 이런 불합리한 구조에 질문을 던지는 데서 출발한다. 보이지 않거나 들을 수 없는 사람, 나이 들어 걷거나 인지 처리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의 입장에서 전시를 구성했다. 미술은 물론 공연, 클래식 등 글로벌 예술계 전반에서 화두가 된 ‘배리어프리’ 전시로 2년간 사전 기획을 거쳐 선보였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강승완 부산현대미술관장은 이렇게 밝혔다.
부산현대미술관 '열 개의 눈' 전시장의 모습. /유승목 기자
부산현대미술관 '열 개의 눈' 전시장의 모습. /유승목 기자
“미술관이 ‘시청각 장애인이나 시니어에게 열려 있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천적 장애뿐 아니라 노화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에 따른 후천적 장애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이죠. 특히 부산이 전국 광역시 중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란 점에서 깊게 생각해볼 문제였습니다.”

전시장은 시각 외 감각으로 감상 방식을 확장하는 실험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 중 정연두의 2014년 작 ‘와일드 구스 체이스’는 전시를 관통하는 작품이다. 전맹 시각장애인이면서 사진가로 활동하는 일본의 시라토리 겐지 작가가 찍은 8000장의 도시 사진 중 1500장을 골라 빠른 템포의 재즈곡을 붙여 만든 슬라이드 형식의 작품이다.
정연두 '와일드 구스 체이스' 한 장면. /유승목 기자
정연두 '와일드 구스 체이스' 한 장면. /유승목 기자
작품 제목 ‘와일드 구스 체이스(Wild goose chase)’는 ‘부질없는 헛된 시도’를 뜻하는 영어 표현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카메라를 들고 현실을 찍는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가 기억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시라토리 작가가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미술관에 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로 2023년 국내에서 배리어프리에 대한 인식을 높인 주인공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전시에 전면 배치된 이유가 보다 명확해진다.

‘코끼리’ 연작으로 유명한 엄정순도 전시에 작품을 내놨다. 엄정순은 코끼리의 일부를 전체로 착각하는 ‘장님과 코끼리’ 우화에서 영감을 받아 ‘보는 것’에 대한 확신을 전복시킨 작품을 선보여왔다. 그가 이번에 선보인 ‘당신의 눈동자를 위하여’ 시리즈는 초상화지만 생김새가 흐릿해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란 뜻이다.
엄정순, '당신의 눈동자를 보는 망원경'(앞)과 벽에 걸린 '당신의 눈동자를 위하여' 시리즈. /사진제공=부산현대미술관
엄정순, '당신의 눈동자를 보는 망원경'(앞)과 벽에 걸린 '당신의 눈동자를 위하여' 시리즈. /사진제공=부산현대미술관
직접 장애를 안고 시각예술가의 길에 발 들인 작가들의 작품들도 나왔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맹인 화가인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의 작품 ‘진정한 사랑은 결국 당신을 찾을 것이다’, ‘꽃과 춤추는 런던이’ 등은 사람과 개가 하나로 융합된 모습을 회화와 조각으로 만든 작품이다. 자신의 안내견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낸 존재적 변신이자, 장애라는 조건이 예기치 않게 더 풍부한 감각과 해석의 세계를 만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배리어프리 전시답게 70여 점의 작품 사이엔 만져지고, 들리고, 움직이는 작품들도 있다. 라움콘의 오브제 작품 ‘한 손 젓가락, 숟가락 그리고 포크’는 직접 착용해볼 수 있고, 김은설의 ‘잔상 덩어리’는 작품 표면에 귀를 살며시 대면 떨림이 만들어내는 흐릿한 소리가 들린다. 이 밖에도 작품마다 점자 해설과 음성 도슨트, 자막이 병기됐다. 어려운 말을 늘어놓는 전시 서문 대신 웹툰 형식으로 전시에 대한 설명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전시는 9월 7일까지.

부산=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