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법의 보편·일반성 원칙'이 무너진다면
몽테스키외는 3권 분립을 내세운 이유로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고, 한계에 이를 때까지 이를 행사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3권 분립의 기본 틀은 견제와 균형이고,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법치다. 법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의미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원칙 중 하나로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보편성, 일반성을 꼽았다. 특정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 특수한 사정, 특별한 목적을 고려해서는 법다운 법이 아니라고 했다. 법이 권력자와 특정 권력집단에 의한 수단이 되고 시민을 통제하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경계한 것이다.

법의 보편성은 ‘시대를 불문하는 보편적 가치를 잣대 삼아 사리 분별과 신중함으로 현재의 모순을 개선’(로버트 니스벳)하려는 보수주의 정신과도 맥이 닿는다. 민주주의는 제도적 안정이 필수고, 이는 법치에 의해 지탱한다. 법치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입법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타협을 위한 토론과 숙의는 법의 허점을 보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를 생략하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법의 보편성이 훼손된다. 다수결이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임에 틀림없지만, 소수당의 비토권을 무시하고 법이 정파의 이해 관철을 위한 도구가 된다면 ‘법에 의한 지배’로 전락한다. 이게 대의민주주의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투표를 통해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파가 국민의 뜻이란 명분으로 법을 입맛대로 만들어도 된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걱정은 무수히 제기됐다. 몽테스키외가 대의정치를 최선의 정체로 본 데 대해 자칫 입법 권력이 무제한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우려는 진작부터 나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다수파 정당이 ‘인민의 권리를 위한 열정’에 과도하게 사로잡힐 수 있다며 입법부의 독재성을 경고했다. 미국이 입법부 내에서 서로 견제해야 한다며 상원과 하원으로 나눈 이유 중 하나다. 데이비드 흄이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강조한 것도 자의적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법치가 특정 정파의 권력 도구로 전락하는 현상이 대한민국 정치에서 권위주의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도 목도되고 있는 것은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해 계엄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윤석열 전 대통령에 이어 각 정당의 헌법재판소를 향한 압박, 더불어민주당이 벌이는 사법부를 향한 총공세는 정상적인 법치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절감케 한다. 민주당은 판검사 법 왜곡죄, 검사기피죄 관련 법안을 꺼내고 ‘판사 선출제’ ‘사법부 민주적 통제’를 외쳤다. 이 후보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 환송이 있자 피고인이 당선되면 재판을 정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허위사실 공표죄 삭제법안도 냈다. 대법원장, 법관 탄핵을 겁박하고 내란이란 무시무시한 딱지를 붙이고 있다. 내란이 저잣거리 좌판이 된 듯하다.

대법관 증원 주장은 민주당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꽂아넣겠다는 의도다. 대법원장 특검, 국정조사, 청문회가 필요하다고 하고, 법원에 이 후보 공판 연기를 요구한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이 후보는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의 해프닝”이라고 했다. 사법부를 얼마나 가볍게 여겼으면 이러나. 이런 행태는 과거 이 후보가 “법률 해석은 범죄자가 아니라 판검사가 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도 배치된다. 만인에게 보편타당성을 지녀야 할 법치가 개인을 위한 수단이 돼 버린 듯하다.

사법부의 책임도 크다. 이 후보에 대한 공직선거법 재판은 1심 선고가 6개월 이내에 나와야 하는데, 2년2개월이 걸렸다. 법이 정한 강행 규정을 제대로 지켰다면 대선 목전에서 이런 사달이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판사와 법원에 따라 극과 극의 판단을 내리면서 사법 불신도 키웠다. 그럼에도 정치와 사법의 영역은 엄연히 다르다. 법원 판결에 불만이 있다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여야 한다. 선거로 선출되지 않아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법부를 법으로 통제하려 하고, 줄탄핵으로 행정부를 마비시키려 한다면 입법 권력에 의한 ‘연성독재’(soft despotism)와 뭐가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