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물의 극 중 관계의 전개 방향은 ‘시작‘이다. 생면부지 혹은 비교적 먼 관계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으로 ‘출발’하는 설정이 해피엔딩을 목적으로 향하는 까닭이다. 스페인에서 입지를 다지고 유럽에서 주목받는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은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2024)에서 로맨스물의 기존 공식을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색다른 사연을 선보인다.
‘거꾸로 하다’, ‘뒤집다’는 의미가 반영된 ‘The Other Way Around’를 영어 제목으로 하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커플은 더는 상대에게 호기심이 남아 있지 않은 14년 차이다. 영화를 만드는 알레(잇사소 아라나)와 연기를 하는 알렉스(비토 산츠)는 서로를 향한 뜨거운 애정은 언감생심, 그동안 지내온 오랜 시간을 관성으로 삼아 사랑보다는 무르고 무관심보다는 지내온 시간의 뿌리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영화
이제 둘 사이의 유효기간이 만료했다고 생각한 걸까, 관계의 끝을 반영한 듯 캄캄한 새벽녘에 잠결인지 말똥말똥한 정신인지, 둘은 별안간 이별을 합의한 것도 부족해 이를 기념해 파티까지 하자고 의기투합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별을 결정한 이들의 표정과 말투와 행동에는 서로를 향한 원망 혹은 안타까움 또는,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는 아랑곳없고 오히려 죽이 척척 잘 맞는 거 같아 하늘이 맺어준 짝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거 중인 알레와 알렉스는 이별 후, 더 정확히는 이별 파티 후 따로 살 집을 보러 ‘함께’ 다닌다. 만나는 지인과 마주치는 이웃에게 “우리 헤어지기로 했어요”라며 합창하듯 ‘같이’ 이별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별 파티에 들어갈 프로그램을 짜려, 초대할 게스트 목록을 추리려 ‘머리를 맞대고’ 고심을 거듭한다. 이게 지금 이별을 앞둔 커플이 헤어짐에 대처하는 통상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오히려 지긋한 사랑을 증명하고자 일부러 이별을 택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커플을 내세운 건 감독의 의도일 테다. 사랑을 출발점 삼는 대개의 로맨스물과 다르게 이별을 기본값으로 잡아 지나온 관계를 되짚는 전개는 알레와 알렉스 간의 애정도가 얼마인지를 측정하는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확인처럼 호나스 트루에바는 그림을 배우는 알렉스가 알레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영화의 주제에 관한 가이드로 삽입한다.
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영화
알렉스가 알레의 초상화를 그린 지 1년, 공을 들인 것과 다르게 완성을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어떻게 디테일을 줘서 마무리할지 방법을 모르겠다. 알렉스의 지인이자 미술 선생의 조언에 따르면, 그럴 때 그림을 ‘거꾸로’ 놓고 보면 기존의 선과 면과 색과 형태가 다르게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자 정말로 그림이 다시 보이는 것처럼 이별을 약속한 알렉스와 알레는 둘의 관계가 헤어짐을 선언하기 전과는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사랑했던 관계를 복기하듯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기존 로맨스물의 공식을 뒤집는 혹은 거꾸로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메타 영화의 맥락도 포함하고 있다. 알레와 알렉스가 각자의 생활을 준비하며 이별을 공식화한 시점에서 영화는 별안간 이 둘의 사연이 실은 알레가 만들고 알렉스가 출연 중인 영화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알레와 알렉스가 이별을 운운하며 파티를 기획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단순히 영화적 설정을 위한 건가?
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영화
기존의 로맨스물이 스크린 안에서만 유효한 판타지와 같았다면 호나스 트루에바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통해 스크린 바깥과의 접점을 마련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현실에서도 커플이나 오랜 관계를 유지한 이들이 한 번 생각해 볼 법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고전으로 통하는 로맨스 영화나 사랑과 관련한 유명한 경구 같은 것의 언급이 빈번하게 이뤄진다.
그중 소개하고 싶은 건 완벽주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의 『영화는 우리를 개선할 수 있는가』이다. 극 중에서 알레의 아빠가 이별 소식을 듣고 딸에게 읽어보라며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카벨은 로맨틱 코미디의 클래식으로 평가받는 <이혼소동>(1937) <필라델피아 스토리> <연인 프라이데이>(이상 1940) 등을 언급하며 다시 잘해보기로 한 연인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스탠리 카벨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니까, 호나스 트루에바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영화는 우리를 개선할 수 있는가』의 영화 버전으로 만든 셈이다. 언급한 책의 내용을 나침반 삼는다면 알레와 알렉스의 이별 통보는 곧 꺼져가는 사랑의 불씨도 다시 보자는 차원의 우회한 확인이다. 결국, 알레와 알렉스의 이별 파티는 재결합 혹은 결혼의 해피엔딩을 맞이할 텐데 현실에서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오래된 관계에서 오는 관성에 지친 커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영화다.
관계의 끝에서 출발해 관계의 새로운 시작으로 마무리하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기존 로맨스물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당 장르를 다시금 보게 한다. 극 중에는 카벨의 『영화는 우리를 개선할 수 있는가』와 더불어 키르케고르의 『반복』도 중요하게 언급된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달라지려는 노력, 호나스 트루에바는 로맨스물의 변화를 꾀하는 마음으로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