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9인의 정신과 의사, 플로어웍스, 2023
: 지식이 아닌 공감을 전하는 아홉 명의 정신과 의사 이야기
<2편>
중독(판도라의 상자) 편 (천영훈/마약중독치료전문가, 인천참사랑병원 원장)
바야흐로 지금은 가히 ‘중독’의 시대다. ‘스마트폰’에 중독되고, ‘쇼츠’에 중독되고, 현대인들은 ‘즉각적 보상’이라는 무서운 속성을 지닌 중독에 탐닉한다. 중독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중독은 역시 마약 중독이다.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의 공동 저자인 천영훈은 정신과에서 가장 치료가 힘들다는 마약 중독에 특화된 정신과 전문의로, 국내 유일의 마약 중독 치료 전문가이다.
사진출처. unsplash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는 마약 중독자들을 오해했다. ‘대체 왜 마약에 빠지지?’ 아주 너그럽게 이해해서 호기심 탓이거나 주변 권유로 한 번 마약을 경험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결국 자신 ‘의지’ 문제니까 결국은 '박약' 탓이란 생각이 확고했다.
그러나 이 책은 한번 마약을 하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중독 메커니즘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약은 본인 ‘의지’만으로는 끊을 수 없는 심각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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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조차도 마약 중독 환자들이 쾌락에 빠져서, 마약에 미쳐서, 의지가 약해서 다시 약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마약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유는 뇌의 쾌락 중추에 영구적인 장애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책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中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긍정적인 감정들은 우리 뇌의 쾌락 중추, 즉 보상계에서 엔도르핀과 도파민을 분비하면서 이뤄지는 작용이다. 그런데 쾌락 중추는 단 한 번의 필로폰 투약에도 막대한 양의 엔도르핀과 도파민을 분비한다. 그 양이 얼마나 어마어마하냐면, 단 한 번 필로폰 투약에 성관계에서 극락의 쾌감을 느낄 때 분비되는 엔도르핀의 약 30~100배가 최장 72시간 동안 쏟아진다고 한다.
마약 중독환자들은 자신을 “천국을 엿본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끔찍한 사실은 이러한 극한의 쾌감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지옥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발걸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 책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中
저자는 마약 중독자들을 ‘판도라의 상자를 연 사람들’로 표현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란 의미의 이름을 지닌 판도라는 제우스 동생인 프로메테우스와 결혼한다. 그런데 제우스는 불을 훔쳐서 인간들에게 준 동생에게 몹시 분노한 상황이다. “절대로 열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판도라에게 준 상자는 결국 열리고 만다. 상자 안에선 인간사의 나쁜 것들이 모두 나온다. 저자는 바로 우리 시대 판도라의 상자는 바로 '마약'이라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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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게 증상이 재발해 찾아왔을 때 나는 내 진료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감정의 이면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 당신이 사람이라면 좀 바뀌어야 할 게 아 니냐’라는 식의 오만함이 있었던 것이다.
- 책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中
그 역시 중독환자를 만나면서 중독은 도무지 낫지 않는 재난 같은 질병으로 여겨졌고, 공포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중독환자, 그중에서도 치료 난이도가 가장 극상이라는 마약중독환자 전문의사가 된다. 그건 그가 내가 감히 환자를 ‘치료한다’는 오만함을 버리고 ‘회복을 돕는다’는 마음을 먹으면서부터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감히 환자를 치료하고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생각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신과에서 전능감이라 부르는 오만함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책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中
단 한 번 투약으로도 뇌에 치명타를 입히는 마약은 결국 시작 자체를 안 하는 것이 답이다. 그러나 마약이 그토록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에 무지한 경우가 태반이다. 저자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이사를 맡으며 열성적으로 마약의 폐해를 알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마약은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이면, 치료가 필요한 심각한 질병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마약중독자들을 환자로 보기에 그들의 죄마저 너그럽게 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는 우리 사회가 그토록 무서운 마약에 대해 실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마약 중독자가 될 것이라고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마약은 나쁜 거야”라는 말만 들었을 뿐, 왜 단 한 번의 투여만으로도 평생을 지옥에서 보내야 하는지를 제대로 교육받아 본 적이 없다. 지옥행 급행열차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 책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中
저자가 마약중독환자들을 보면서 매우 상반된 감정을 겪으며 내면의 성숙을 보여주는 부분은 이 책의 백미다. 그는 중독에 대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발점이라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중독이라는 병은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끔찍한 병이다. 하지만 지옥문 앞까지 갔던 이들이 자기 삶을 회복해나가는 모습은 기적의 체험과도 같다. 중독이라는 병은 죽음을 향해가는 병이지만, 회복 속에서 한 사람의 인격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축복 같은 병이기도 하다.
- 책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中
마약에 단 한 번이라도 손대는 것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것이라 규정하는 저자는 판도라는 ‘모든 선물을 가진 자’라는 뜻에 주목한다. “선물이란 내 오랜 노력을 통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불쑥 내게 건네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사실 모두 판도라일 수 있다. 도처에 마약, 도박 등 단숨에 열기만 하면 쾌락을 주는 상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인생 자체가 선물이다. 우리가 원해서 우리의 인생을 얻은 것이 아니듯이, 이미 주어진 선물 같은 인생에서 또 다른 선물, 즉 마약 같은 ‘즉각적 보상’을 바라는 것은 재앙이 든 선물 상자를 스스로 개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