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이야기] 선거와 부동산 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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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공간 이야기] 선거와 부동산 공약](http://img.wvnryckg.shop/photo/202504/0Q.40277892.1.jpg)
'드라마는 사실적일 때 시청자에게 감동을 주고, 선거는 드라마틱(dramatic)할 때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한다.'
방송 분야에 몸담은 지인에게 선거에 이기는 방법을 물었더니 한 문장으로 답을 주었다.
선거 과정 자체가 역전과 반전을 거듭하고,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해야 당선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런 표현을 한 것 같다. 이러한 믿음 때문인지 후보자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만들기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눈에 띄는 색상의 유니폼을 입고, 개사한 유행가를 귀가 아플 정도로 반복해서 틀고, 심지어 맨바닥에서 엎드려 유권자를 향해 절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여 상품의 판매를 유도하려는 기업의 모습과도 닮았다. 광고와 홍보를 통해 감성에 자극받은 고객은 상품의 가치에 확신이 생기면 구매한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하는 순간 바로 알게 되고 마음에 들면 다시 구매한다. 기업에 대한 신뢰감이 쌓이면 충성도 있는 고객이 된다.
부동산개발이라는 상품
후보자는 ‘공약’이라는 상품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간 정당 주력상품 중 하나는 ‘부동산개발’이었다. 기업의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에 유리하고 국민 생활과도 밀접하여 표를 얻는 데는 이만한 상품은 없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장사가 몹시 더운 여름날 해변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할 때 어느 위치에서 하는 게 가장 유리할까?
미시경제학자 헤럴드 호텔링(Harold Hotelling)이 주창한 호텔링 이론은 선거에서도 적용된다. 좌우파의 이념적 성향이 보통 정규분포로 이루어졌을 때 정책이나 각 입장들이 중간에 수렴한다는 이론이다. 사람들이 정규 분포한다고 가정하고 정 가운데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장사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가장 부합할 것이다.
즉 선거 공학적으로 보면 중간에서 멀어질수록 얻을 수 있는 표의 양이 줄어드는 셈이다. 이론은 각 정당의 이념을 떠나 그동안 부동산공급과 관련된 공약이 난무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선거철 정치 공약에도 놀랍도록 유사하게 작동한다. 진보든 보수든, 결국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 다수가 있는 중간 지점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전통적인 부동산 개발 공약은 뒷전으로 밀리고, 대신 주거비 부담, 임대료 안정, 최소 주거 기준 같은 ‘생활 공약’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는 이념의 수렴이라기보다, 현실의 수렴이자 유권자의 삶에 다가가려는 자연스러운 진화일지도 모른다.
2008년 총선 당시 서울 지역구에서 나온 국회의원 후보 상당수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출마 지역 뉴타운 개발계획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뉴타운 사업은 집값 상승이란 학습효과를 얻은 유권자에게 변함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니 이를 재생산 한 것이다. 국민은행 부동산 시세 조사에 따르면 제16대 대선과 지방선거가 있었던 2002년 한 해 동안 서울 집값은 20% 이상 올랐으며, 2006년 서울시장 선거가 있었던 제16대 지방선거에서는 18.9% 뛰었다. 2008년은 부동산 침체기가 시작된 상황이었음에도 서울지역 집값은 5%나 올랐다.
개발 공약의 실종
2025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지만, 예년과 달리 ‘대규모 부동산 개발’이 주요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는 인상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본다면, 정치권은 예전처럼 개발과 공급 확대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보다 생활밀착형 이슈로 이동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 배경엔 세 가지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며, 국민 개개인의 가처분 소득이 줄고 부동산 수요 역시 위축됐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사는 것’보다 ‘사는 데 드는 비용’을 먼저 걱정하는 시대다.
둘째, 복지 수요가 늘면서 재정 운용의 우선순위도 바뀌었다. 2025년 정부 예산에서 복지 분야는 처음으로 30%를 넘겼지만,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은 축소되었다. 삶의 기본을 지탱하는 데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해진 것이다.
셋째, 유권자의 인식 변화다. 집값은 다시 오르고 거래량도 늘었지만, 가계부채 부담이 여전한 상황에서 단순한 공급 확대나 규제 완화만으로는 시장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유권자들은 이제 공약의 ‘그럴듯함’보다 ‘실현 가능성’과 ‘삶의 체감도’를 먼저 본다. 국민들이 똑똑해졌다기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의 관심이 '개발'보다 '주거복지'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커 보인다.
주거복지라는 신상품
아직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여당은 품질 높은 공공임대주택의 공급과 장기 거주가 가능한 시스템 구축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야당은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주거비 지원과 민간 임대시장에 대한 규제 정비 등을 주요 방향으로 논의하고 있는 분위기다.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서민 주거비 부담 완화와 주거 안정이라는 큰 틀에서 양측이 비슷한 지점으로 수렴할 가능성은 높다.
때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원칙이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차별화할 것이 있다 하더라도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특정 지역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라 할지라도 그들만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주거복지를 실현하는 길은 분명 아니다. 모처럼 나온 신상 공약 중에 국민들의 표심을 넘어 민생에 도움이 되는 히트상품이 나와 주기를 바란다.
공약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 유권자의 몫이지만, 믿고 선택해준 국민에게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공약을 제대로 실천했을 때 국민은 충성도 높은 단골손님이 될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명재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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