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사케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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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자리 넘보는 일본 청주의 매력
사케가 일본을 넘어 한국,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한때 국내에서 정종으로 통칭되던 이 술은 이제 최고 등급인 ‘준마이다이긴조’와 향이 살아 있는 정제된 ‘긴조’, 그리고 살균 처리하지 않은 생사케 ‘나마자케’란 이름으로 고유한 개성을 뽐낸다. 서울 곳곳에 사케 전문 바가 생기고, 한식 레스토랑의 페어링 리스트에도 자연스럽게 든다. 와인과 위스키를 거쳐 한국 고급 레스토랑 테이블에 ‘사케의 시간’이 찾아왔다.
사케는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술이다. 알코올 도수나 브랜드 이름보다 향과 온도, 목 넘김의 여운을 원하는 이들이 사케를 찾는다. 사케는 그런 이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다. “나는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라 머물기 위한 술이야.”
사케는 느린 술이다. 그 느림은 지금 우리가 갈망하는 감각에 가깝다. 빠르게 소비하고 잊히는 대신 오래 머물며 천천히 음미하는 리듬. 한 모금에 머무는 침묵의 시간. 누군가는 사케를 ‘작은 사색의 술’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마시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마시는지를 묻는 술. 그래서 사람들은 사케를 마신다고 하지 않고 사케와 머문다고 한다.
사케는 와인이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대체하고 있다. 와인이 미각과 교양의 언어라면 사케는 온도와 감각의 언어다. 복잡한 품종과 빈티지를 외우기보다 계절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변주를 선사한다. 한식에도 잘 어울리고 테이블 위 대화를 느리지만 풍부하게 한다.
지금 테이블에 놓인 사케 한 잔은 단순한 술이 아니다. 그건 당신이 어떤 감각에 머무르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한 잔의 표정이다.
쌀 한 톨 깎고 깎아…한 잔의 예'술'이 되다
일본 문화의 정수, 사케는 어떤 술인가
쌀과 물, 시간의 예술
사케에는 양조장 장인들의 정신이 녹아 있다. 사케의 기준은 엄격하다. 일본 주세법은 쌀, 누룩, 물 등을 이용해 발효한 뒤 술지게미를 거른 주류만을 사케(청주)로 정의한다. 쌀이 아니라 과일, 고구마 등을 이용하거나 섞었다면 사케로 취급하지 않는다.
사케의 정성은 쌀에 있다. 쌀을 얼마나 잘 깎아냈느냐가 맛을 가른다. 발효 과정에서 잡맛을 낼 수 있는 겉껍질, 지방층 등을 제거하는 게 핵심이다. 쌀밥용 백미는 도정률(깎고 남은 쌀 비율)이 90%지만 사케용 쌀은 적어도 70% 이하를 쓴다. 도정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도정은 되도록 천천히 진행한다. 무작정 빠르게 깎으면 쌀알이 파괴돼 오히려 잡맛이 날 수 있어서다. 도정률 50% 쌀을 만드는 데 이틀에서 길게는 1주일까지 소요된다. 도정률이 낮은 고급 사케는 과일 향, 꽃 향 등 풍부한 향을 낸다.
도정률이 60% 이하는 긴조슈(吟醸酒), 50% 이하면 다이긴조슈(大吟醸酒)로 분류한다. 양조 알코올 등을 첨가하지 않고 쌀·누룩만을 이용해 빚은 순수한 사케는 준마이슈(純米酒)다. 도정률이 50% 이하면서 준마이슈에 해당한다면 준마이다이긴조슈로 부르는 식이다.
숙성 시간은 사케 맛을 한 번 더 가른다. 두 달가량의 짧은 숙성을 거쳐 그해 처음 나온 술을 통상 신슈(新酒)라고 한다. 새 술의 상큼함이 특징이다. 3년 이상의 숙성을 거친 고슈(古酒)는 옅은 중후한 맛을 낸다. 숙성 정도에 따라 색도 금색, 갈색 등으로 짙어진다.
물은 사케의 근원이다. 미네랄이 많이 든 경수는 묵직한 맛을, 미네랄이 적은 연수는 부드러운 맛을 낸다. 물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사케 명산지로 꼽히는 일본 고베 효고현은 경수가 풍부한 지역이다. 묵직한 맛 덕에 ‘남자의 술’(오토코자케)이란 별명이 있다. 반면 연수가 나는 교토 후시미의 사케는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여자의 술’(온나자케)로 꼽힌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는 “유명한 일본 양조장들은 좋은 쌀과 좋은 물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 있어 지역색이 강하다”고 말했다.
계절·온도·잔의 조화
마실 때의 온도, 잔의 크기, 계절에 따라 풍미가 달라진다는 점은 사케의 또 다른 매력이다. 섭씨 5도까지 차갑게 한 사케는 ‘유키비에’라고 부른다. 깨끗한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실온 상태에서 마시는 ‘히야’가 일반적으로 사케를 마시는 온도다. 40도 근처까지 데운 사케는 ‘누루칸’이다. 이 근처 온도에서 사람은 단맛을 가장 잘 느낀다. 사케가 지닌 특유의 향과 단맛이 극대화한다. 50도 이상의 ‘아쓰칸’은 추운 겨울에 먹기 좋지만 알코올 향이 강해지고 맛은 단순해진다. 주요 사케는 라벨에 추천하는 온도를 적어두기도 한다.
계절에 따라 제철 사케도 다르다. 살균, 숙성을 거치지 않고 곧장 나오는 ‘시보리타테’는 신선함이 생명이기에 출하가 이뤄지는 겨울철에서 이른 봄에 적합하다. 상쾌한 향과 청량한 탄산감이 특징이다. 본격적인 봄철에는 두 달간의 숙성을 거친 신슈가 나온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사케다. 신슈를 여름 동안 숙성하면 자극이 줄어들고 농후함이 늘어난 ‘히야오로시’가 된다. 가을철에 어울리는 술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여름에 차갑게 즐기기에 적합한 ‘나쓰자케’ 상품도 나오고 있다.
술잔은 마시기 전 마지막 풍미를 결정한다. 입구가 넓은 사카즈키는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사케를 마시는 데 써왔다. 물잔 정도 크기인 구이노미는 손의 온도와 비슷한 미지근한 사케를 마실 때 쓴다. 반면 차가운 사케는 더 작은 잔인 오초코에 따라 온도가 변하기 전 빠르게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일본 됫박인 마스도 사케 잔의 일종으로 쓰인다. 잔을 넘치도록 따라 흥을 돋우는 마스자케를 마실 때 됫박을 술잔 밑에 받친다.
"오사카에서 마셨던 맛이네"…사케바로 달려가는 MZ
늘어나는 사케 전문 술집
4월 봄기운이 찾아들 무렵 찾은 서울 금호동 주택가 인근의 한 이자카야. 저녁 7시부터 늦은 밤까지 이런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테이블 곳곳엔 사케용 도쿠리병, 마스자케 술잔이 있었다. 일본 여행 이야기, 사케의 맛 평가로 이야기꽃이 피었다. 30종의 사케를 파는 이곳은 최근 SNS에서 ‘사케 맛집’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여행 붐 이후 사케를 전문적으로 파는 이런 술집이 많이 생겨났다.
사케 수입량도 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사케 수입량은 전년(5415t) 대비 5% 늘어난 5684t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수입 주류의 강자인 위스키, 와인의 작년 수입량이 각각 2만7000t, 5만2000t 규모임을 고려하면 절대적인 물량은 적다.
하지만 위스키, 와인의 작년 수입량이 전년 대비 8%, 10%씩 줄어든 점을 고려하면 사케 인기가 높아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사케는 2019년 ‘노재팬 운동’이 일자 수입량이 급감하기도 했으나 최근 2019년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사케 인기가 높아진 배경에는 엔저(低) 현상과 일본 여행객 증가가 있다. 2022년 무렵 엔저로 인해 일본이 ‘가성비 여행지’로 떠오르자 일본을 찾는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지난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약 881만 명으로 역대 최대치였다. 일본 현지에서 사케를 마셨던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국내에서도 사케 소비를 이어간 것이다.
사케가 지닌 특유의 감칠맛과 쌀의 풍미는 한식과도 잘 어울린다. 자극적이지 않은 한정식, 전류, 회·육회와 궁합이 좋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는 “사케는 원재료의 맛을 끌어올리는 데 좋은 술”이라며 “사케 특유의 향은 식전주, 반주로 어울린다”고 했다.
MZ세대 취향 소비문화도 사케 소비가 늘어난 배경으로 꼽힌다. 사케 브랜드 미이노코토부키가 2023년 농구 만화 슬램덩크와 협업해 내놓은 한정판인 이른바 ‘정대만 사케’는 국내 만화 팬 사이에서 “구경도 하기 힘든 술”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미려한 디자인의 사케 병은 그 자체로 장식품이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는 닷사이, 구보타 공병을 3만~5만원에 거래하기도 한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시기 위스키의 인기가 높았다면 지금은 사케가 그 열풍을 잇고 있다”며 “지역, 도정에 따른 다양한 특색을 지닌 점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MZ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라고 분석했다.
칼 대신 잔을 들었다…사무라이 가문, 사케 名家로 변신
수백년 전통 잇는 日 대표 양조장들
사케는 1600년대 에도시대부터 일본과 함께했다. 에도시대의 사케 전통을 지금까지 지켜나가는 곳이 있다. 홋카이도의 오토코야마 양조장이다. 이 양조장에서는 ‘장수의 물’로 알려진 청정 지하수를 사용해 사케를 만든다. 다이세쓰잔산맥의 눈이 녹아 수백 년간 지하에서 정제된 천연 암반수로, 이 물로 빚은 사케는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이다.
나가노현의 마스미도 360여 년 역사를 지닌 양조장이다. 시작은 이 지역 영주를 섬기던 사무라이 미야사카 가문이었다. 미야사카 가문은 전국시대의 오랜 전쟁 끝에 검 대신 술을 들기로 결심하고 사케 양조의 길로 들어섰다. 마스미는 ‘사케 효모 7호’를 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1946년 일본국립양조연구소와 협력해 이 효모를 찾아냈고, 이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효모로 자리 잡았다.
14대째 가업을 이어온 양조장도 있다. 교토의 쓰키노 가쓰라 양조장이다. 쓰키노 가쓰라라는 이름은 에도시대 문인 아야노코지 아리나가가 쓴 시에서 유래했다. “맑은 달빛 아래 가쓰라강의 물을 밤에 길어 올리면 그 수려함이 세상에 퍼진다”는 구절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문학의 사케’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이 양조장은 1964년 니고리 사케(탁한 사케)를 개발해 명성을 얻었다. 니고리 사케는 발효하는 도중 병입되기 때문에 은은한 탄산감이 특징이다.
후쿠시마현의 다이시치 양조장은 일본에서도 드물게 ‘기모토 방식’을 고수한다. 기모토 방식은 17세기 초 개발된 전통 발효법으로 현대 기술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다. 특히 쌀을 찔 때 기계를 사용하는 대신 전통 방식을 고집한다. 거대한 솥을 이용해 찌는 방식이다.
시가현의 시치다는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특징이다. 시치다 양조장은 1998년부터 쌀을 자체 재배하기 시작해 70% 이상 현지 쌀을 사용한다. 주변 강과 폭포에서 취수한 일본의 100대 명수(名水)로 불리는 물을 쓴다. 이와테현의 난부비진은 이름 그대로 ‘남부의 미인’을 뜻한다. 이 양조장은 지역 농업 및 상업과의 협력, 그리고 ‘지산지소(지역 생산 지역 소비)’ 정신을 기반으로 사케를 빚는다.
야마구치현의 닷사이는 준마이 다이긴조슈만 생산한다. 최고급 쌀을 극한까지 정미해 부드럽고 섬세한 맛을 살린다. ‘닷사이(獺祭)’는 수달이 물고기를 제물처럼 늘어놓는 고대 문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양조장은 원심분리기 등 첨단 기술을 적용해 신선하고 균형 잡힌 풍미를 선보인다.
각 지역의 역사와 혼을 지닌 사케는 전 세계의 부름을 받고 있다. 일본 사케 수출액은 10년 새 세 배 넘게 늘었다. 각 양조장에서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전 세계의 입맛에 맞게 무설탕 사케, 스파클링 사케 등을 개발해 혁신을 꾀하고 있다. 이제 사케는 일본만의 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사케를 통해 수백 년에 걸친 역사를 음미하고 있다.
"닷사이의 프리미엄 사케…첨단 기술과 손끝에서 탄생하죠"
사쿠라이 가즈히로 닷사이 대표
일본 프리미엄 사케 브랜드 ‘닷사이’의 사쿠라이 가즈히로 대표(사진)는 지난 16일 기자와 만나 “전통의 맛을 고집하기보다 매일 더 나은 맛을 지향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닷사이는 최근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프리미엄 사케 중 하나로 꼽힌다. 도정률 50% 이상의 다이긴조슈이자 쌀, 쌀누룩을 이용해 빚은 준마이만 제조한다. 제품 이름에도 도정률을 앞세웠다. 닷사이23·39·45 등 준마이 다이긴조슈만 취급한다.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아 현재 40여 개국에 진출해 있다. 미쉐린 쉐프인 야니크 알레노와 손잡고 프랑스 파리에 문을 연 ‘이자카야 닷사이’를 비롯해 미국 영국 등에 있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과 협업 중이다. 2023년에는 뉴욕 하이드파크에 닷사이의 첫 해외 양조장 ‘닷사이 블루 사케 브루어리’를 세웠다. 사쿠라이 대표는 “사케는 이제 프랑스, 태국 음식, 심지어 한식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주류 반열에 올랐다”며 “와인과 같이 사케도 저녁 식사와 페어링할 수 있는 선택지로 자리 잡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지난해 한국의 닷사이 수입량은 2017년 대비 열 배 급증했다. 그는 “한국은 젊은 세대가 사케를 주도하는 시장”이라며 “일본에서는 중장년층이 주요 소비자인데 한국은 20~30대가 열광하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닷사이의 정체성을 ‘진화하는 사케’로 요약했다. 고급 쌀을 23%만 남기고 깎는 기술, 수작업의 감각, 원심분리기까지 동원한 정밀한 생산 공정이 닷사이의 경쟁력이다. 그는 “사람 손이 느낄 수 있는 쌀의 촉감, 물의 흡수 정도 같은 것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다”며 “기술과 손끝이 조화를 이뤄야 진짜 맛이 나고 이를 통해 맛이 진화한다”고 했다.
사쿠라이 대표는 제조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닷사이라는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사케업계로 돌아왔다. 아버지인 사쿠라이 히로시는 야마구치현에서 생산·유통되던 닷사이를 일본 전역으로 확장했다. 사쿠라이 대표는 자신의 임무를 ‘사케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세계화를 위한 과제로는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사케가 ‘상온 보관이 되는 술’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는 “상온에 놔두면 더 많이 팔 수 있지만 사케 고유의 맛을 지키려면 반드시 냉장 유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고정관념의 해체다. “사케는 스시에만 어울린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식과 페어링하도록 할 겁니다.세계 각국의 음식과 어울리는 사케를 이끄는 브랜드를 만들 겁니다.”
안재광/배태웅/라현진 기자 ahnjk@wvnryckg.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