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서울의 고등학교 교실은 여러 가지가 달랐다. 그중 반 학생들 상당수가 안경을 낀 모습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특히 수업 시간마다 질문도 잘하는 급우들은 모두 안경 낀 학생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렇게 보니 안경 낀 친구들만 눈에 띄었다. 가끔 친구들이 책상에 벗어놓은 안경을 내가 껴보기도 했다. 어지러웠지만 참고 있는 내 모습을 친구들이 보고 “어울린다. 천재처럼 보여”라고 농담할 때 기분이 좋았다. 안타깝게도 시력은 정상이었다. 양호실에서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 하자 그 자리서 시력검사를 해줬다. 양호 선생님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밤에 백열등을 당겨 책을 가까이서 눈이 아프도록 읽었다. 며칠 지나 양호실을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은 “안경을 껴야겠다”며 병원에서 검사를 다시 받으라고 했다. 시력검사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양호실 시력검사표를 몰래 외웠기 때문이다. “안경을 껴야겠어요. 양호실에서 시력검사가 안 좋게 나왔어요”라고 말씀드리자 놀란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했다. 안경 끼는 걸 세 번이나 반대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날 때 시력이 나빠진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성근시(假性近視)다. 오랜 시간 한곳에 집중하다가 먼 곳을 볼 때 근육이 쉽게 이완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근시다”라고 설명했다. 곧 나아질 거라며 “잠을 잘 자라”고만 처방했다. 안경 얘기는 없었다. 눈은 점점 나빠졌다. 안경점에 들러 시력검사를 하자 비정상, 안경을 써야 하는 붉은색 표시 숫자나 문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장난 끝에 살인 난다'라는 속담처럼 우스운 놀이가 큰일로 번졌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하교해서 골목을 지날 때 담장 밖으로 호박순이 삐져나와 있었다. 친구들은 손으로 쳐서 순을 꺾어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을 던져 순을 맞춰 떨어뜨렸다. 모두 돌을 던져댔다. 그러다 담장 안으로 빗나간 돌이 장독대를 맞혔는지 '와장창' 옹기 깨지는 소리가 밖으로 크게 들렸다. 모두 도망쳤다. 안이 궁금해 담 너머를 살짝 들여다본 것인데 옆집 아주머니 얼굴과 마주쳤다. 아무 일 없는듯 집에 들어와 앉자마자 옆집 아주머니가 집에 찾아와 방 안에 숨은 나를 부르고 난리를 쳤다. 어머니에게 이끌려 나온 내가 다른 아이가 돌을 던졌다고 말했지만, 아주머니의 악머구리 끓듯 하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대꾸가 없자 풀이 죽은 아주머니가 대문을 '쾅' 닫고 나갔다. 아주머니가 대문 밖에서 안에다 “병신 새끼”라는 악담을 퍼붓자 어머니가 밖에 나가 동네가 떠나갈 듯 서로 소리치며 어른 싸움이 일었다. 병신이란 말은 아버지가 6·25 때 전상을 입어 다리를 잃은 뒤로는 우리집의 금기어였다. 나도 평생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때 막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상황 설명을 듣지도 않고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해 종아리를 때렸다. 처음엔 아파 눈물도 나왔지만 참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는 게 두려웠다. 어머니가 뜯어말리지 않았으면 더 맞았을 것이다. 이튿날은 걷기가 어려울 만큼 피멍이 들고, 피떡이 종아리를 덮었다. 학교 가지 말라고 아버지가 엄명했다. 간장독은 내가 깨뜨린 걸로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옆집 줄 간장을 종일 달였다. 대문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책가방에 집어넣고 학교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중학교 다닐 때다. 기차 시간에 늦어 정신없이 집어넣었던 도시락이 거꾸로 집어넣어 흔들렸다. 뚜껑이 열린 채로 김칫국물이 흘러나와 교과서가 온통 젖어 냄새를 풍겼다. 첫 수업 시간에 꺼낸 국어책은 국물이 흘러 벌건 색으로 한참 부풀어 올랐다. 꺼내기도 힘들었다. 선생님은 책을 안 가져온 내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세게 때렸다. 적절한 말이 그땐 떠오르지 않았지만, 속상했다. 유독 국어책만 심하게 젖었다. 국어는 수업이 매일 들어있었다. 이튿날 국어책을 챙기려는데 어머니가 책을 건네줬다. 어머니가 밤새 책을 물걸레질해 김칫국물을 빼내고 숯불 다리미로 한 장씩 넘기며 다리미질했다. 벌건 고춧가루 색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책이 축축했다. 그래도 수업 시간에 책을 꺼내놓을 수 없어 그날도 손바닥을 회초리로 맞았다. 국어 선생님이 책을 안 가져온 이유를 대라고 할 때 대답을 안 하자 어제보다 더 세게 때리셨다. 하교해서 책가방을 마루에 집어 던졌다. 집에 들어오던 아버지가 보고 불렀다.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을 일일이 캐물었다. 그날 아버지가 대뜸 한 말이 “야속해하지 마라”다. 누구한텐 가는 원망을 퍼부어야 할 텐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야속하다’라는 말을 난생처음 들었다.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감정을 뜻하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돌아가거나, 누군가의 행동이 차갑고 무정하게 느껴질 때 쓰는 표현이다. 가까운 사람이 나를 배려해 주지 않거나, 운명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 흔히 쓴다. 야속한 사람이 터무니없긴 했지만, 나는 애꿎게
한동네 살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 지났다. 같이 들었던 아버지가 불렀다. 직장에 다닐 때다. 친구 묘지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일 핑계 대며 안 가봤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화를 낼 만한 일이 10여 년 전에 있었다. 재수해서 본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뵐 낯이 없어 술 취해 이튿날 늦게 귀가하자 아버지가 시험 결과를 물었다. 자리를 피하려고 “합격했습니다”라고 둘러댔다. 아버지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집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지인이 아버지에게 내 불합격을 먼저 알리며 앞에 두 명이 있긴 해도 그 학생들이 등록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있다고 상세하게 알려줬다고 한다. 닥치는 대로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이 전남 순천에 있는 선암사(仙巖寺)다. 세상을 하직하려고 하루 종일 헤맸다. 사찰 경내에, 땅에 붙다시피 옆으로 뻗어나간 와송(臥松)의 질긴 생명력을 보고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으로 가지 못하고 이틀을 굶은 채 구로동 공장에 다니는 친구 자취방을 찾아갔다. 골목을 몇 번이나 헤집어 집을 찾고는 이내 쓰러졌었다고 했다. 그 친구 보살핌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몇 달 같이 지냈다. 그날 이후 만나지 못했던 그 친구의 부음을 들었을 때 크게 놀랐다. 아버지는 네가 나서 살펴야 했을 진정한 친구라며 책망하고, “‘벗 우(友)’가 왼손과 오른손을 맞잡아 교차하는 것처럼,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친구다”라고 정의했다. 친구는 벗을 뜻하는 붕우(朋友)다. 중국 전한(前漢) 말기 학자 양웅(楊雄)은 ‘벗으로서 마음을 나누지 않으면 얼굴만 아는 벗이고, 친구로서 마음을 나누지 못하면 얼굴만 아는 친구이다’라고 아버
발표한 글이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제재를 받는 일이 필화(筆禍)다. 사전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터졌다.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 집 앞에 이르자 나를 본 낯선 두 남자가 다가섰다. 내 이름을 불러 본인임을 확인한 그들이 커피 한잔하자고 했다. 다방으로 갈 때 한 사람은 내 뒤를 바짝 쫓았다. 먼저 자리에 앉은 이가 태릉경찰서 보안과장이라고 자기 신원을 밝히며 내 신원을 다시 확인했다. 내 옆자리 앉은 이가 내가 내민 주민등록증을 꼼꼼하게 뒷면까지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마시라며 담배를 피워문 과장이 한 말은 간단했다. 성북서에서 이첩받은 건이다. 학내 소요가 큰 모양이다. 학생이 쓴 성명서로 소요 사태가 커졌다고 한다. 학교를 개혁하자는 학생의 생각에는 일견 동의한다. 그러나 4학년이다. 이제 곧 졸업이다. 더 나은 다른 방법을 찾을 기회다. 공부에 전념해라. “소요가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학교에 나가지 마라. 학교에서 알아서 다해줄 거다.” 그는 자신도 그런 때가 있었지만, “그 때 어른 말씀 듣고 공부했다. 경찰에 들어와 애 둘 낳고 산다. 현실을 직시해라. 인생 별거 아니다”라면서 내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말을 마칠 동안 내 옆에 앉은 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 아버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으로 내 머리를 쳤다. 그렇게 아프게 맞아본 일은 오랜만이었다. 노여움은 컸다. 경찰에 있는 지인이 줬다면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쓴 글이었다. 며칠 전 경찰이 찾아와 알려준 학내 소요 사태를 일으킨 그 성명서였다. ‘대학을 혁신해야 한다’로 시작되는 글은 ‘우리의 요구’ 부분 맨 끝
운전할 때 교통방송을 듣는 버릇이 든 지 오래됐다. 통신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언제 들어도 신뢰를 넘어 정겹기까지 하다. 아버지는 “교통뉴스야말로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않아도 될 만큼 정확하다”라고 평가했다. 아버지 지인의 자녀 결혼식에 내가 운전해 모시고 갈 때 들었던 말씀이다. MBC가 교통방송을 시작한 1993년이었다. 청계고가를 내려 종로예식장으로 갈 요량으로 길에 들어섰으나 답십리부터 정체했다. 방송은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알려줬다. 짜증 나서 라디오를 꺼버리고 아는 샛길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은 더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라디오를 켜라고 했다. 라디오는 우리 사정을 본 듯 “샛길까지 모두 정체가 심하다. 종로 큰길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길을 안내했다. 교통 통신원이 전하는 정체 상황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평소 주말보다 오늘 교통량이 많습니다. 긴 정체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차와의 안전거리 충분히 확보해야겠습니다. 정체가 시작된 신설동에서 광화문까지 1시간 넘게 시간 넉넉히 잡으셔야 하겠습니다. 동대문까지 3㎞ 구간에서 특히 제 속도 내기 어렵습니다. 차량 흐름이 좋지 않아 큰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동대문 앞에는 사고가 나 1차로가 막혀있어서 차선변경 잘하셔야겠고요. 그 여파로 종로 진입 차량 병목현상으로 서행하고 있습니다.’ ‘막힌다. 정체된다, 밀린다, 주춤한다, 차들이 줄지어 지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차간거리 좁혀 지난다, 신호 두 번 받아도 지나가기 어렵다’ 등 똑같이 차가 막히는 상황이어도 느낌이 다른 표현들을 라디오가 쏟아냈다
결혼하고 처음 맞는 설날에 세배할 때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덕담을 하지 않았다. 갓 태어난 손자를 안은 아버지는 세배만 받고 말았다. 설날이면 한 해 계획을 으레 물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는 이미 대학 시험에 합격한 것처럼 ‘대학생’으로 불러 기정사실화하는 방법으로 격려했다. 은행에 다닐 때다. 아버지의 덕담은 매번 그런 식이어서 한 해 계획을 물어보면 ‘대리 승진’이라고 준비했었으나 묻지 않았다. 방으로 따로 부른 아버지가 그제야 새해 계획을 물었다. 준비했던 대로 대답했으나, 전처럼 ‘대리’라고 불러주는 덕담은 하지 않았다. 명리학에 밝은 아버지는 “네 운을 점쳐보니 올해 대운(大運)이 드는 해다. 몇 가지 징조가 있으니 너도 느낄 거다. 이동 수가 보이는데 너는 이미 마음을 정한 거 같다”라고 했다. 대리 승급을 포함한 전직 제의를 받고 있긴 했지만, 동업계는 시시하고 이종업계는 두려웠다. 말씀드리지는 않았으나, 아버지는 그걸 간파한 것 같았다. 이어 “최선만 택하는 삶이 옳은 것은 아니다. 차선도 얼마든지 빛난다”며 선택을 망설이던 내게 힘을 보탰다. 담배 피우며 뜸 들인 아버지는 “직장의 승진은 목표나 계획이 아니다. 그걸 추구하는 삶은 추하다. 승진은 좇는 게 아니라 따라오는 거다”라고 지적했다. 말씀이 길었다. “목적은 방향을 정하고, 목표는 도달할 대상을 보여준다. 목적은 너를 일으켜 세우고, 목표는 너를 뛰게 만든다”라고 전제했다. “삶의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이유는 네가 가진 유한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네 삶의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다. 계획이 있으면
생전의 아버지는 ‘사람’보다 ‘인간(人間)’이란 말을 즐겨 썼다. 단순히 사람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인간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철학적 관점을 언제나 그렇게 강조했다. 입버릇처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그래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까지 했다. 아버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믿음이다”라며 ‘관계’를 곧잘 얼음에 비유했다. “살얼음도 있지만, 단단해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얼음도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얼음 같은 믿음은 깨질 수가 있다”라며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새로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1964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혁명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일하느라 집을 비웠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이튿날부터 마을 일을 보기 시작했다. 시멘트 공장이 마을에 들어올 때다. 공장 지을 용지 매입 실무를 맡은 아버지는 밤을 새워 일했다. 부지 매입이 마무리된 이튿날에는 공사 인부 기숙사와 식당을 짓기 위해 처음 보는 불도저 두 대가 마을에 들어왔다. 동생과 같이 쓰는 우리 방이 기사들이 먹고 자는 방으로 변했다. 불도저는 공장 용지가 될 논을 훤히 내려다보이는 낮은 산을 곧추서다시피 기어 올라갔다. 반나절이 지나자 전에 살던 집 안방 문을 열면 보이던 해 뜨는 산이 날아갔다. 이튿날 기사들이 동생과 함께 불도저에 태워줬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산이 순식간에 뭉개져 내렸다. 그날 저녁 아버지께 흥분한 내가 “해가 뜨는 산이 무너졌다”라고 하자 말씀이 길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이 ‘믿음’
만화책을 읽다 밤을 새웠다. 동이 틀 무렵에 홀연 잠이 들었다. 안절부절못한 어머니는 “아버지 아시면 큰일 난다”라며 흔들어 깨웠다. 초등학교 다닐 때다. 평소처럼 학교에 다녀온 나를 아버지가 불러 대뜸 “괜찮다”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하고 싶을 때는 밤을 새워서라도 해라. 창의성은 거기서 나온다. 하기 싫어 마지못해 한 일에서 창의성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했다. 밤을 새운 행위보다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자식의 집중력과 몰입력을 높게 평가했다. 공부나 창의적인 활동 등 다른 분야에서 중요한 자질이 있다고 해석했다.집에 온 손님들에게 “우리 집 큰 애가 공부하느라 밤을 새웠다”라며 자랑했다. 아버지는 만화 본 일을 공부하느라 밤새웠다고 덮어 내게 부끄러움을 안겼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남달라요. 아이가 스스로 시간을 계획하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자율성과 책임감이 있어요”라고 심하게 한 자식 자랑을 옆방에서 들었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깊이 파고드는 능력은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을 거둘 힘”이라는 말로 자랑을 끝낸 아버지는 나를 불러 손님에게 인사시켰다.손님이 간 뒤 아버지는 “잠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다.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은 7일 정도다. 그러나 하루 안 자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다른 일을 망친다. 이틀 못 자면 기억력이 손상된다”라고 했다. “사흘 안 자면 뇌가 손상돼 정신 건강에 치명적이다”라며 함부로 밤새는 일을 경계했다. 이어 “너는 밤을 샌 소중한 경험을 했다. 가치 있는 일을
은행에 입행해 얼마 지나지 않은 토요일, 퇴근해 여행 가려고 준비할 때였다. 어머니가 “장남이 돼서 넌 대체 생각이 그렇게 없니? 아버지가 낚시 가신 지 일주일이 넘었다. 궁금하지도 않으냐?”라고 눈물을 훔치며 타박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행을 바로 취소하고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 뒤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늘 혼자 낚시를 다녔다. 한번 길을 떠나면 사나흘은 기본이고 때로는 열흘을 넘기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 안 계시면 나는 그저 낚시 가셨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낚시 간 지 며칠 지나면 어머니는 으레 잠을 주무시지 못했다. “양평으로 간다”라고 했다는 어머니 말씀을 들은 터라 기차를 타고 양평역에 내렸다. 역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를 타고 낚시터로 가자고 했다. 출발한 택시 기사가 “개군에 있는 향리 낚시터죠?”라고 물었다. 강변에서 하신다더라고 하자 기사는 양수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참 달리던 기사에게 강변에 낚시 온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고 하자 대뜸 “지팡이 짚으시는 조 회장님 말씀이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다시 차를 돌려 다리를 건너 강상면 쪽으로 차를 돌렸다. “자주 오셔서 여기 기사들은 다들 압니다”라면서 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좁은 둑길을 굽이굽이 돌아 강가에 내려줬다. 아버지는 거기 혼자 계셨다. 뜻밖에 나를 본 아버지는 “그러잖아도 오늘 돌아가려 했다”라며 반가워했다. 텐트를 걷고 낚시 도구를 챙겼다. 잡은 고기를 담는 살림망은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다 살려줬다. 세월만 낚은 거지”라며 웃었다. 짐 정리가 끝날 때쯤 아버지가 지팡이로
둘째 애가 태어나고서다. 손주들 보러 부모님이 집에 오셨다. 동생이 생겨 시샘하는 큰아이가 낮에 본 장난감을 사달라며 떼를 썼다. 시부모님께 민망했던 아내가 서둘러 “내일 사줄게”라고 했다. 아이는 울음마저 멈췄다. 지켜보던 아버지가 내게 “내일 꼭 그 장난감을 사주거라”라며 들려준 고사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의 아내가 시장에 갈 때 아이가 어머니를 따라가려 울었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 돌아오면 돼지를 잡아주겠다”라며 달랬다. 아이를 떼놓고 장에 다녀오니 남편이 돼지를 잡으려고 했다. 아내가 “아이한테 농담했을 뿐이에요”라며 제지했다. 증자는 “아이는 당신이 한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소. 아는 것이 없는 아이는 부모를 따라 배우고 부모의 가르침을 듣는데, 지금 당신은 아이를 속였으니 이는 속이는 걸 가르치는 일이오. 어머니가 자식을 속이면 자식은 부모를 믿지 못할 것이니 가르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오[母欺子 子而不信其母 非所以成敎也].” 남편은 끝내 돼지를 잡아 삶았다. 이 이야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돼지를 잡아서 자식을 가르친다’라는 ‘살체교자(殺彘敎子)’다.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이 말로 하는 훈육보다 중요하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준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外儲說左) 상편에 나온다. 아버지는 그날 “‘살체교자’의 ‘체’ 자가 낯설 거다. ‘돼지 체(彘)’자”라며 고사성어보다 돼지 얘기를 더 많이 했다. 한나라 고조 유방 부인 여태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인 해제가 황위에 오르자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첫 번째 한 일이 남편 유방이
군 복무는 하루를 더 한 셈이다. 제대 신고하고 영외 장교 숙소에서 이튿날 사단장 부대 방문 브리핑 차트 만드는 일을 밤새 거들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 나오는 부대 차를 타고 집에는 다음날 왔다. 흐뭇해하는 아버지께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집에 데려다주니 고맙죠”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인정받은 네 군대 생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고마운 마음이 사그라지기 전에 편지를 써서 표현하라”라고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썼지만, 아버지가 찾은 아침까지 끝내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라면서 “부대장님 앞으로 지금 네 마음을 ‘고맙습니다’로 시작해서 그대로 글로 옮기면 된다”고 일깨워줬다. 아버지는 읽던 신문 칼럼을 내주며 참고하라고도 했다. 그날 읽은 칼럼이다. 프랑스를 방문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몽마르트르 언덕을 찾았다. 때마침 한 화가가 그림을 시작 못 하고 하얀 캔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째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수행원이 귀띔하자 엘리너는 화가의 붓을 달라고 해 하얀 캔버스에 점을 하나 찍었다. 그걸 본 화가는 깜짝 놀라 붓을 빼앗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럼은 ‘아마추어는 걸작을 만들려다 기회를 놓치지만, 프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시작해 걸작을 골라낸다’라고 마무리했다. 말씀대로 편지를 써 부치고 나자 아버지가 불러 “잘 하려다 시작도 못 하는 것보다 잘못되더라도 도전해본 게 더 낫다”고 했다. 그날 아버지는 ‘잘했다’를 이렇게 설명했다. ‘많다’라는 표현으로 ‘억(億)&rs
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두 번 집을 지었다. 우리가 살던 집을 작은 아버지에게 넘기고 새로 집을 지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내가 봐도 집 짓는 일이 순탄치 않았다. 지대가 낮은 무논에 잡석을 깔고 객토(客土)를 진흙에 섞어 며칠째 지반 다지는 일을 봤기 때문이다. 터다지기가 시작된 날 아버지와 나는 지붕에 씌울 기왓장을 사러 충주에 기차를 타고 갔다. 아버지 회사 트럭은 기와 상차(上車)를 위해 하루 전날 떠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버지는 충주까지 기와를 사러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와공장 김 사장은 아버지보다 두 살 위였지만, 소학교에 같이 다닌 동창생이다. 8.15해방으로 더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 뒤로 서로 연락 없었으나, 6·25전쟁 중 전상을 입어 같은 군 재활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지냈다. 아버지는 오른쪽 다리를, 김 사장은 오른팔을 잃었다. 전역 후 아버지가 상이군경회 진천군지부장 시절 그는 기와공장을 인수해 더욱 친하게 지냈다. 공장에 들어서자 김 사장은 양팔을 벌려 아버지를 반갑게 맞았다. 동창생이라던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큰아버지와 외삼촌들 외에 그런 호칭을 쓰는 걸 처음 봤다. 사장님은 의수(義手)인 오른손을 내밀다 왼손으로 바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 한잔할 시간이 지나고 기와를 다 실었다고 할 때 김 사장은 보자기에 싼 걸 풀어 보였다. 지붕의 추녀 끝에 사용되는 막새(瓦當)에 아버지와 김 사장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있었다. 아버지가 대금을 치렀다. 차에 오를 때 김 사장은 "제천에서 사도 되는데 먼 길 찾아와 고맙네. 차비 좀 넣었네"라며 봉투를 아버지
갈까 말까 망설일 때는 간다. 할까 말까 머뭇거릴 때는 한다. 줄까 말까 미적댈 때는 준다. 내가 지키는 원칙이다. 실패에 따른 후회가 해보지 않은 후회보다 적기 때문이다. 실패 후회는 뼈저린 자책과 극심한 절망감을 안겨주어서다. 더욱이 후회는 오래가고 다른 일에도 절망감이 이어진다. 그러나 살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사지 않는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멈칫할 때는 말하지 않는다. 먹을까 말까 주저할 때에는 먹지 않는다. 쓸까 말까 주춤할 때는 쓰지 않는다. 후회가 적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주로 하지 말라는 쪽이었고 아버지는 ‘먼저 저질러라’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서슴다’였다. 서슴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망설이다’라는 뜻이다. 말끝마다 아버지는 ‘서슴지 말고 먼저 저질러라’라는 말씀을 내가 어릴 때부터 많이 했다. 저 말씀을 내가 기억하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2학년쯤부터다. 동네 부인 계모임에 다녀온 어머니는 만취 상태여서 여럿이 부축해 집에 오셨다. 술주정이 심했다. 처음 보는 일이라 동생들도 놀랐지만, 아버지는 더 놀랐고 곤혹스러워했다. 자리를 펴고 눕게 했지만, 어머니는 바로 일어나 토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래도 했다가 울기도 하고 안 보이는 동생이나 아버지를 찾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버지는 내게 저녁밥을 하라고 했다. 부엌에 들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릴 때 아버지가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을 열고 소리쳤다. “서슴지 말고 먼저 저질러라.” 그래도 우두커니 있자 “밥하는 거 그동안 봤지 않느냐? 그대로 해라. 머릿속으로 밥 짓
아버지가 위로해 준 일이 처음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친구가 사줘 그날 처음 먹은 술이었는데도 취하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처음 보는 일이어서 많이 놀라셨다. “교복 입은 학생이 술 처먹고 다니냐? 아버지 아시면 어떡하려고 그러냐”며 타박하면서 끌다시피 아버지 방에 꿇어 앉혔다. 내가 쓴 글을 선배가 난도질해 화나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구겨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원고를 펴서 드리자 원문과 교정본을 읽은 아버지는 화가 난 이유를 묻지 않고 “화낼 만하구나”라고만 했다.며칠 지나 저녁 먹을 때 아버지는 “글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때 써야 한다”며 “그만한 고민도 없이 쓴 글은 쓰지 않는 것만 못 하다”고 핀잔을 줬다. 지난번 보여드린 원고를 아버지가 내줬다. 얼른 넘겨 봐도 붉은 글씨로 거의 모두 고쳐져 있었다. 살아남은 검은 글씨는 몇 자 되지도 않았다. 붉은 종이에 까만 점을 찍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짧고 긴 공문과 개인 글을 평생 쓴 경험을 바탕으로 글에 관한 독자의 태도를 세 가지로 평가했다. 첫째는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다. 3분의 1쯤 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읽기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네가 쓴 글이라고 해도 읽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두 번째, 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네 글이라고 해서 읽은 3분의 1도 되지 않는 사람만이 공감할 뿐이다. 그것도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예 없거나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네 선배처럼 글을 고쳐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3분의 1쯤 되는 이들이 그나마 네 글과 재주를 아껴준다.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이다”라며
상사가 서울 출장을 간다고 할 때 집에 일이 있다고 얘기해 외박증을 받아 같이 부대를 빠져나왔다. 제대를 몇 달 남겨둔 말년 병장 때다. 시내서 여럿을 만나다 집에는 늦게 들어왔다. 밖에서 한참은 기다렸을 어머니가 “아이고. 왜 인제 오냐? 과장님이라는 소령님이 전화하셨다. 일이 늦어져 내일까지 계셔야 한다며 너는 먼저 귀대하라고 하시더라”라고 했다. 나는 대뜸 “그 사람 참 저번에도 그러더니만. 서울만 나오면 일을 일부러 만드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방문이 열리며 안에서 바깥 얘기를 다 들은 아버지가 “뭔 소리를 하는 거냐”며 냅다 소리 질렀다. 아버지는 “부대에서도 윗사람을 그렇게 부르냐? 상사는 상사다. 가까운 사람과 있을 때 네 말이 새나간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습관이 무섭다. 상사를 존경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사석에서도 반드시 경어를 써야 한다. 경어를 쓰지 않는다 해서 네가 대단하다고 아무도 여기지 않는다. 높임말을 썼다고 네 인격이 깎이는 것 또한 아니다”라며 책망했다. 이어 “불과 두서너 달 전에 새로 부임한 과장님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시라며 네 입으로 얘기했는데, 네 인물 평가가 채 일 년도 못 간다는 말이냐? 그분이 그 자리까지 승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걸 발견 못 한 너는 대체 나이 먹어도 어찌 그리도 경박하냐?”라고 나무랐다. 아버지는 이내 태도를 바꿔 “그동안 잘 참고 견뎌냈다”라고 운을 뗀 뒤 “제대를 앞둔 지금이 권태기”라고 진단했다. 일반적으로 권태는 반복적이고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느낀다. 일상적인 활동이나 업무가 반복되면 자
술에 취해 늦은 밤에 귀가하며 집이 보이는 골목에서 노상 방뇨를 했다. 대학 다닐 때다. 함박눈이 쏟아져 오줌 눈 자리는 바로 덮여 사라졌다. 술도 깬 듯 머릿속도 맑았다. 몇 발짝 떼서 집에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본 이는 없었다. 대문을 열고 마당 계단을 오르다 눈 내리는 골목길을 내려다 보고 서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나를 보자 아버지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아버지 방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내 행동을 아버지가 평소처럼 그 자리에서 나무라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루지 못해 아버지 방을 내내 지켜봤다. 불안해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새벽 일어나자마자 어젯밤 오줌 눈 자리에 가 봤지만, 눈이 너무 쌓여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나를 아버지가 방으로 불렀다. “어젯밤에 대여섯 발자국만 더 걸어오면 되는 집을 놔두고 골목에다 왜 오줌을 누었느냐?”고 물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술에 취해서라고 변명하자 아버지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너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오줌 누기 전에 주변을 살피는 걸 내가 모두 지켜봤다. 마신 술은 집까지 오는 동안에 네 알코올 분해력이면 다 깼을 것이다”라며 내 행동을 “술을 핑계 삼은 객기(客氣)다”라고 단정 지었다. 객기는 ‘객쩍게 부리는 혈기(血氣)나 용기’라고 정의한 아버지는 “손님이 주인집 일에 참견하듯 별로 귀담아들을 말이 없을 때나 쓰는 실없고 싱거운 짓이다”라고 나무랐다. “그런 행동은 오만(傲慢)함에서 나온다”라며 “잘난 체하며 남을 낮추어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옹졸하다”라고 지적했다. “술이 아니라
왼팔이 며칠 새 저리고 아파서 퇴근길에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곧장 집으로 갔다. 은행에 다닐 때다. 일찍 귀가한 나를 본 아버지가 대뜸 왼쪽 팔이 아프냐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느냐고 되묻자 “왼쪽 어깨가 처지지 않았느냐?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거울에 비춰봐라. 한눈에 봐도 어깨가 내려앉은 게 보인다”라며 아픈 왼쪽 어깨를 쳤다. 팔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 눈물이 났다. 아버지는 서랍을 열어 흰색 알약을 하나 꺼내주면서 바로 먹으라고 했다. 의자에 앉자 아버지는 양손으로 손깍지를 껴보라고 했다. 오른손 엄지가 편하게 위로 올라왔다. 손을 바꿔 왼손 엄지가 위로 올라오게 깍지를 껴보라고 했다. 어색했다. 이번에는 팔짱을 껴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오른손이 위로 올라왔다. 왼손이 위로 올라오게 반대로 팔짱을 껴보게 했다. 역시 어색했다. 이어 다리를 평소대로 꼬아보라고 했다. 오른쪽 다리가 익숙하게 왼쪽 다리 위로 올라가자 그 반대로도 해보라고 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 위로 올라오는 건 둔했다. 아버지는 “거울에 비춰봐서 알아챘겠지만, 네 몸은 눈에 띄게 왼쪽으로 기울었다. 중증이다”라며 간단한 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어제오늘에 생긴 질환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비뚠 자세가 병을 키운다. 삼십수 년을 그렇게 미세하지만 바른 자세를 취하지 않아 병이 생긴 거다. 바른 자세에서 건강이 나온다. 네 몸 네가 망친 거다”라고 질책했다. 아버지가 벼루를 내줬다. 양말을 벗고 발에 먹물을 묻혀 흰 종이 위에 앉았다가 일어서라고 했다. 난생처음 풋 프린트(Footprint), 발도장을 찍었다. 오른쪽 발
아버지와 겸상하고 숟가락을 들 때 집 전화벨이 울렸다. 결혼해 한집에서 살 때다. 거래처 대리 전화였다. 받자마자 그는 내가 퇴근할 때 물어본 일이 잘 진행되었다고 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상사에게 설명을 잘해 그 일이 성사된 거라고 공치사했다. 전화를 끊지 않고 이어 상사인 과장이 판단 실수한 때문이라며 요즘 자주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험담했다. 나도 “그렇긴 하더라구요. 내가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말입니다. 김 과장 결혼할 때 가서 축의금도 냈는데, 내 결혼식엔 오지도 않고 축의금도 안 보냈습디다”라고 응수했다. 그때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밥상을 내려쳤다. 놀라 전화를 바로 끊었다. 상을 물린 아버지는 옮기기도 어려운 욕을 하며 심하게 나무랐다.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김 과장한테 할 얘기를 아래 직원에게 하느냐는 것이고, 김 과장이 부조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섣불리 둘 사이의 일을 발설하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전화해 설명하라고 했지만, 집 번호를 모른다고 하자 내일 출근하자마자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축의금 안 냈다고 비난하지 마라. 왜 안 냈느냐고 물어보긴 뭣하지만, 그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다. 네가 100을 줬다고 상대가 반드시 100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게 정 서운하면 네가 그의 봉투를 만들어 축의금을 접수하면 될 거 아니냐”라며 옹졸함을 책망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네 마음과 같지 않다. 더욱이 네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네 기대에 맞춰 정형화하는 건 위험하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다르다. 천 사
어둠이 내린 신작로를 따라 걸을 때 지나던 트럭이 저만치 가다 멈췄다. 어둠 속에서도 트럭이 뱉어낸 흙먼지가 자욱했다. 운전사 쪽 문이 열리며 타라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다닐 때다. 기차 타러 가다 같이 통학하는 친구들이 짜장면을 먹고 가자고 했다. 그날따라 만두가 먹고 싶어 나만 빠졌다. 만두를 시켜 먹고 부리나케 역으로 달려갔지만, 막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30리 넘는 길을 걸어오다 중간에서 트럭을 만난 거다. 아버지 석재공장 트럭이었다. 차에 타자 아버지가 “왜 혼자 걸어가느냐?”라고 물었다. 사정을 얘기하자 아버지는 “왜 짜장면이 먹고 싶지 않았냐?”고 또 물었다.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같이 통학하는 친구 중에 싫어하는 친구가 끼어 있어 같이 가기 싫었던 건데 그런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 같이 가는 친구들은 의혹을 품게 되고 자칫하면 오해를 낳는다. 설사 만두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도 짜장면을 같이 먹지 않는 납득할만한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해 줄 수 없다면,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장으로 차를 보내고 마을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동안 아버지 말씀은 계속됐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집요하게 물었다. 짜장면을 먹으러 간 친구들은 누구누구냐. 이름이 뭐냐. 같은 동네 친구가 아니면 그 애는 어디 사느냐고 캐물었다. 특히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를 세세하게 물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아버지는 “그 친구들을 만나면 하나하나 모두 만나 설명해줘라. 만두 먹은 얘기 빼고 아버지 편지 심부름을 깜박 잊어버린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