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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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아무 일 없는듯 집에 들어와 앉자마자 옆집 아주머니가 집에 찾아와 방 안에 숨은 나를 부르고 난리를 쳤다. 어머니에게 이끌려 나온 내가 다른 아이가 돌을 던졌다고 말했지만, 아주머니의 악머구리 끓듯 하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대꾸가 없자 풀이 죽은 아주머니가 대문을 '쾅' 닫고 나갔다. 아주머니가 대문 밖에서 안에다 “병신 새끼”라는 악담을 퍼붓자 어머니가 밖에 나가 동네가 떠나갈 듯 서로 소리치며 어른 싸움이 일었다. 병신이란 말은 아버지가 6·25 때 전상을 입어 다리를 잃은 뒤로는 우리집의 금기어였다. 나도 평생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때 막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상황 설명을 듣지도 않고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해 종아리를 때렸다. 처음엔 아파 눈물도 나왔지만 참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는 게 두려웠다. 어머니가 뜯어말리지 않았으면 더 맞았을 것이다. 이튿날은 걷기가 어려울 만큼 피멍이 들고, 피떡이 종아리를 덮었다. 학교 가지 말라고 아버지가 엄명했다. 간장독은 내가 깨뜨린 걸로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옆집 줄 간장을 종일 달였다. 대문을 열어주지 않아 문 앞에 간장 항아리를 놓고 왔다. 하교 시간에 담임 선생님과 대여섯 명 친구들이 집에 찾아왔다. 다들 호박순을 돌 던져 자르던 친구들이었다.
사흘 동안이나 학교에 가지 못했다. 오른쪽 다리 부기가 가라앉지 않아서다. 저녁때 옆집에서 찾아와 부모님께 사죄했다. 내가 깬 게 아니라 다른 친구가 그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이 일일이 물어서 찾아냈다고 한다. 모두 돌아간 뒤 아버지가 나를 불러 말씀 끝에 인용한 고사성어가 ‘사불범정(邪不犯正)’이다. 바르지 못한 사악한 것이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정의가 반드시 이김을 의미하고, '정의를 이길 수 있는 불의는 없다'라는 말이다. 유속(劉束)의 수당가화(隋唐嘉話)에 실린 데서 유래했다.
당나라 태종(太宗) 때 서역에서 온 승려가 주술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했다. 태상경(太常卿) 부혁(傅奕)이 태종에게 한 말이다. “이는 요사스러운 술법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사악함은 정의로움을 범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에게 주술을 걸어보게 하십시오. 절대 통하지 않을 겁니다” 태종 지시로 그에게 주술을 걸어 보게 했으나 반응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승려가 갑자기 고꾸라져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사악함은 정의로움을 범할 수 없다[邪不犯正]’를 늘 염두에 두겠습니다” 지금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성어다.
아버지는 “네가 한 짓이 아니더라도 어른이 집에 찾아와 역정을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라며 내 자세를 문제 삼았다. 이어 서로를 잘 아는 이웃을 대할 때는 이 말을 명심하라며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그땐 침묵이 웅변이다”라고 해법을 제시하며 다독였다. 그 집 아주머니가 “저 애 입술 깨물고 노려보는 것 좀 봐”라고 소리치던 말을 아버지는 두세 번 더 불필요한 태도였다고 지적했다. 아버지는 “사나이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즉응적 태도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라며 말을 마쳤다. 치료해주던 아버지는 몇 번이나 종아리를 만져줬다. 그 후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지 않았다.
사실과 달라 바로잡고 싶은 생각이 앞서는 일이 살다 보면 한두 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억울하고 손해 보는 듯한 일도 많이 생긴다. 그때마다 이겨내려고 애쓰는 일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부질없다. 그걸 깨닫기는 쉽지 않지만, 한 번쯤은 참고 바로잡힐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도 중요하다.
지금 억울함을 토로하는 게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감정을 눌러두는 힘이 자제력이다. 단순히 참는 법이 아니라, 감정과 상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이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결국 진실은 드러난다’는 강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걸 갖춘 대인(大人)의 도량(度量)이나 풍모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자제력은 근육처럼 만들어진다. “한 번 참았더니 좋은 결과가 있었어” 같은 긍정적인 강화 경험이 자제력을 키운다. 다만 제 장난감에 손댔다고 할아버지인 나를 쏘아보는 손주를 가르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내 아버지가 실패해 종아리를 세게 감정을 실어 때렸듯이 가르치는 내 감정을 먼저 눌러야 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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