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사이클’에 부활한 중형 조선사 > 대한조선, HJ중공업, 케이조선 등 국내 중형 조선 3사가 2008년 이후 최대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부산의 HJ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9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이 건조되고 있다.    부산=김우섭 기자
< ‘슈퍼사이클’에 부활한 중형 조선사 > 대한조선, HJ중공업, 케이조선 등 국내 중형 조선 3사가 2008년 이후 최대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부산의 HJ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9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이 건조되고 있다. 부산=김우섭 기자
지난 12일 찾은 전남 해남의 대한조선에서는 다른 조선소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하나의 독(dock·선박건조장)에서 274m짜리 중형 원유운반선과 컨테이너선에 넣을 블록을 동시에 제작하고 있었다. 독이 하나뿐인 중형 조선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좀처럼 쓰지 않는 ‘텐덤 공법’을 도입한 것이다. 대한조선 관계자는 “10년 전만 해도 텅 비었던 독에 3년 치 일감이 꽉 차자 고안한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대한조선, HJ중공업, 케이조선 등 국내 중형 조선 3사가 14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동반 흑자를 냈다. 1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대한조선은 사상 최대 영업이익(1581억원)을 기록하고, HJ중공업(조선 부문·291억원)과 케이조선(112억원)은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업계에서는 올해 3사 합산 영업이익(4200억원 추정)이 작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하고, 내년에는 6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수주 잔액도 사상 최대로 불었다. 중형 조선 3사 수주액은 2020년 9300억원에서 지난해 3조4000억원으로 4년 새 3.6배 늘었다.

10년 전만 해도 조(兆) 단위 손실을 낸 중형 조선사의 부활을 부른 것은 ‘조선업 슈퍼사이클’이다. HD현대중공업 등 대형 조선사의 독이 꽉 차자 중형 조선사로 일감이 넘어가는 ‘낙수효과’가 본격화했다.

K조선 낙수효과는 덤…특수선·중형탱커 '틈새 공략' 적중

2008년 세계 5위 조선사(건조량 기준)였던 HJ중공업(당시 한진중공업)의 ‘고난의 항해’는 예상보다 길었다. 그해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는 신규 선박 발주의 씨를 말렸다. 2012년과 2013년 HJ중공업의 조선소 가동률은 말 그대로 ‘0%’가 됐다. 독(dock·선박건조장)을 그냥 놀렸다는 얘기다. 생존의 기로에 선 HJ중공업이 찾은 돌파구는 중소형 특수선. 대형 조선사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경비함, 공기부양선 등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체력을 비축한 HJ중공업이 요 몇 년간 ‘조선업 슈퍼사이클’을 타고 완전히 부활했다.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빅3의 독이 꽉 차자 HJ중공업, 대한조선, 케이조선 등 중형 3사로 일감이 넘어오는 ‘낙수 효과’ 덕분이다. 미국의 중국 제재로 한국 조선소를 찾는 글로벌 선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만큼 중형 조선사들의 수주 호황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특수선만 7대 건조하는 HJ

중형 조선 3社, 14년만에 동반 흑자
13일 방문한 HJ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는 한마디로 ‘공사판’이었다. 2개 독에는 마무리 작업이 이뤄지는 9000TEU급 컨테이너선들이 들어섰고, 땅에선 특수선 7대에 사람들이 달라붙어 한창 작업 중이었다. 공기부양선 4척과 고속 경비함 2척, 어업지도선 1척 등 선종도 다양했다. HJ중공업 관계자는 “1937년 영도조선소 문을 연 이후 이렇게 많은 특수선을 동시에 건조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HJ중공업의 부활은 단순히 슈퍼사이클이 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10년 전부터 중소형 특수선과 친환경 선박에 ‘올인’해온 전략이 이제 결실을 보는 측면이 크다. HJ중공업은 구축함이나 초계함 등 대형 특수선 시장에 뛰어들려면 독을 추가로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대형 조선사와 맞붙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틈새 공략으로 방향을 잡았다.

친환경 선박에 주목한 건 중국의 저가 공세를 피하기 위해서다. 액화천연가스(LNG)를 연료로 쓰는 LNG추진선 분야에선 중국의 기술력이 아직 한국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HJ중공업은 지난 2월 LNG 벙커링선을 11년 만에 수주했다.

◇대한조선, 중형 탱커 세계 1위로

대한조선도 HJ중공업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2009년 워크아웃(채권단 관리) 과정에 주력 사업을 블록 제작에서 중형 탱커(12만t급 원유운반선)로 돌렸다. 대한조선의 ‘방향 전환’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것이 확인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한조선은 지난해 세계 중형 탱커 시장에서 점유율 12.6%로 1위에 올랐다.

장사도 잘한다. 제조업인데도 영업이익률이 14.7%에 달한다. 강재 전처리부터 블록 제작까지 모든 공정을 외주 없이 직접 맡는 사업구조 덕분이다. 대한조선은 하반기 기업공개(IPO)를 통해 조달한 자금을 선종 개발 등에 투입할 계획이다.

중소형 탱커에 집중하기는 케이조선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7만4000t급 탱커 시장 점유율 19.1%로 세계 1위다. 작년 7월엔 세계 최초로 LNG와 디젤연료를 함께 쓸 수 있는 중형(5만t급) 탱커도 개발했다. 회사 관계자는 “대형사들이 대형 탱커에 집중한 덕분에 중형 탱커 시장을 접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중형 조선사들의 실적 질주는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 정부가 중국산 상선에 입항 수수료를 물리기로 하면서 한국 조선사를 찾는 글로벌 선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대한조선 관계자는 “미국이 중국 봉쇄 정책을 발표한 이후 컨테이너선 발주 문의가 3~4배 늘었다”며 “선박을 빨리 받고 싶어 하는 선주들이 대형사 대신 중형사를 찾는 만큼 수주 호황이 4~5년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남=김진원/부산=김우섭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