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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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로 시작해 이영애로 끝났다.

막이 오르고, 32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이영애가 등장하는 것으로 연극 '헤다 가블러'는 시작된다. 130분의 러닝타임 동안 배우 이영애는 격정적인 분노와 매혹적인 눈웃음, 상대방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고혹적인 언행으로 1300여명의 관객의 마음까지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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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가 타이틀롤로 활약한 '헤다 가블러'는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장군의 귀한 딸로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던 여성이 결혼 후 느끼는 권태감과 갈등, 내면의 혼돈을 다룬 작품이다. 세계적인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작품을 원작으로, 로렌스 올리비에상 각색상을 수상한 리처드 이어의 버전으로 지난 8일 상연을 시작했다.

1891년 1월 31일 독일 뮌헨에서 처음 선보여졌지만, 1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주인공 헤다가 출산과 육아를 강요당하고, 남편의 트로피가 된 현실에 좌절하며 번뇌에 휩싸이는 모습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현실에 울림을 준다. 특히 이영애는 "예쁘고 또 예쁘다"고 묘사되는 헤다에 완벽하게 몰입하며 매혹적이고 파괴적인 그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마마보이'에 버금가는 '고모보이'라고 할 만큼 무슨 일이든 "고모에게 말해야 한다"는 남편 조지과 임신을 강요하는 줄리아나, "우리의 유일한 수탉이 되겠다"며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는 무례한 판사 브라크만으로도 헤다는 우울증에 신경쇠약에 걸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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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술과 여자를 좋아했지만, 재능만은 뛰어났던 이엘리트가 그의 동창이자 정숙하고 헌신적인 아내 테아를 만나 남편 조지까지 자격지심을 느끼는 작품을 만들어내자 헤다의 질투심은 극에 달한다. "내 인생에서 한 번쯤 한 사람의 인생을 조종해보고 싶었다"는 헤다의 뒤틀린 욕망이 더이상 숨기지 못하고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헤다를 포함한 7명의 주요 배우들은 자신의 활약이 끝나면 무대 뒤의 의자에 앉아 감정을 이어간다. 막이 끝날 때까지 별도의 퇴장 없이 무대 뒤에서 극의 배경이 되는 셈이다. 심지어 의상 교체 역시 무대 위에서 이뤄진다.

여기에 헤다, 조지 부부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베르트의 카메라를 통해 갈등 장면에서는 순백의 무대 뒤 배경에 배우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헤다가 총을 겨누고, 에일레트와 과거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극적인 장면에선 어김없이 클로즈업이 등장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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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헤다가 에일레트의 원고를 불태우는 장면은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했던 이영애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동시에 헤다가 이미 정상인으로서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아님을 느끼도록 한다.

그렇지만 단순히 여성 연극이라고 하기엔 '헤다 가블러'가 선사하는 감정은 다채롭고, 폭넓다.

각색을 맡은 리처드 이어는 "입센이 작품의 제목을 '헤다 테스만'이 아닌 '헤다 가블러'라고 정했다"며 "이 지점은 헤다가 남편의 아내가 아닌 장군의 딸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임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종종 위대한 연극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축소하려 한다"며 "'헤다 가블러'를 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극으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일반화는 처음 이 작품에 매료된 근본적인 복잡성과 모호함을 잃게 만든다"면서 관객들이 이 연극을 통해 사유하는 경험을 하길 당부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