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역대급 난세를 이겨낸 기업들
장금상선이라는 해운회사가 있다. 대장금엔 비할 바도 안 되는 무명에 가까운 기업이지만 HMM 다음으로 큰 국내 2위 해운그룹이다. 더 놀라운 건 재계 순위가 KT&G, 코오롱, KCC보다 높은 32위(자산 기준)라는 점이다. 2019년 당시 국내 5위 흥아해운을 인수한 뒤 5년 만에 회사 덩치를 세 배로 키운 결과다.

최근 한국 전통 산업군에서 장금상선처럼 단기간 내 대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10년 치 통계를 봐도 업종 자체가 뜬 바이오와 정보기술(IT), 가상자산 관련 회사들이 고작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흔하디흔한 인수합병(M&A)이 고속 성장 비결의 전부는 아니다. 장금상선 창업주인 정태순 회장은 남들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1989년 창사 이후 다들 돈 된다고 달려든 원거리 북미 항로에 눈독 들이지 않았다. 대신 중국 해운사들 탓에 먹을 게 없다는 한·중 항로로 향했다. 중국 바닷길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한·중 합작사로 시작했다. 중국 양쯔강(장강)을 뜻하는 장(長)과 한국의 금수강산을 의미하는 금(錦)을 합친 장금상선이란 사명이 그래서 나왔다. 영문명도 중국과 한국을 섞은 시노코(sinokor)로 정했다.

회사 이름대로 중국 사업을 고수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중국 측 파트너인 시노트랜스가 합작사에서 철수한 뒤에도 중국 항로를 버리지 않았다. 중국과 무역이 많은 동남아시아로 사업을 확장했다. 근거리 해운의 절대강자로 우뚝 서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북미 항로 일변도이던 한진해운이 망하고 현대상선(현 HMM)이 10년 가까이 적자를 내는 와중에도 이 회사는 끄떡없었다. 오히려 경쟁자가 줄면서 2000년 이후 줄곧 흑자를 내고 있다. 그 어렵다던 작년에도 매출과 영업이익을 두 자릿수 비율로 늘렸을 정도다.

장금상선만 위기에 강한 게 아니다. 국내 유일의 고무벨트 제조사인 동일고무벨트는 80년 가까이 ‘고무 외길’을 걸으며 지난해에도 성장 가도를 달렸다. 60년 넘게 용접 재료만 제조한 고려용접봉 역시 중국의 저가 공세를 이겨내며 지난해 이익을 늘렸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벽돌공장으로 시작한 삼양은 한물간 광산을 인수해 대박이 났다. 다들 채산성이 없다고 외면한 국내 철광석 산지를 발굴해 20년 치 먹거리를 확보했다. 빈사지경인 여느 가구 회사와 달리 에이스침대는 저만의 방법으로 승승장구 중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자사 광고 카피처럼 나름 과학적인 부동산 투자로 독주 채비를 갖췄다. 저금리 때 돈이 생기는 족족 빌딩을 매입해 대리점주에게 주변 시세보다 싸게 임대했다. 금리가 상승해도 임대료를 올리지 않아 대리점주들이 끝까지 함께하겠다며 의기투합한 결과 이 회사는 작년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 국내 게임업계는 생사기로에 놓였지만 크래프톤과 스마일게이트는 매번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휘청거릴 만큼 앞이 캄캄한 시기다. 그럼에도 SK하이닉스는 만년 2등에서 벗어나 최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그 과정에서 한미반도체 같은 ‘한국형 슈퍼을’도 탄생했다. 역대급 내우외환의 위기라고 해도 다 망하는 건 아니다. 역발상과 한 우물 경영으로 무장한 기업 사례에서 보듯 난세는 견딜 수 있고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