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家 공주 예물이었던 향수, 프랑스 왕실선 왕비의 물로 불려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깊숙이 있는 것을 바꾼다. 사람의 기억과 감정이다. 어떤 향기는 들이마시는 순간 잊고 지내던 기억까지 끄집어낸다. 누군가의 향기를 맡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영화와 소설에서 ‘클리셰’처럼 자리 잡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향수를 쓴다. 이 순간을 오래도록 남기고 싶을 때, 나쁜 기억을 지우고 기분을 전환하고 싶을 때 가장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이 후각을 자극하는 향수를 뿌리는 것이다. 과거 향수는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근대에 와서야 대중화했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니치 향수까지 발전을 거듭했다. 인류 역사 속 향수의 세계로 떠나보자.

신의 물에서 왕비의 향수까지

메디치家 공주 예물이었던 향수, 프랑스 왕실선 왕비의 물로 불려
‘신의 물.’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향수를 이렇게 불렀다. 신을 모시던 고대인이 제사를 지내기 전 향나무를 태우고 잎의 즙을 짜서 몸에 바른 게 향수의 기원이다. 향수를 의미하는 영단어 ‘퍼퓸(perfume)’의 어원만 봐도 그렇다. ‘통해’를 뜻하는 ‘퍼(per)’와 ‘연기’를 의미하는 ‘퓸(fume)’을 합친 단어다. 그들은 향기를 통해 신과 닿고자 했다.

향수는 오랫동안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 이때 장미 향수를 가득 뿌린 배를 띄웠다. 최초로 기름이 아니라 알코올을 사용한 향수로 알려진 ‘헝가리 워터’는 1370년께 헝가리 왕비 엘리자베스를 위한 것이었다. 헝가리 워터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70세가 넘어서도 폴란드 왕으로부터 구애를 받았다고. 중세 시대에 서양 귀족들은 향수를 사치품으로 사용했다. 적은 양에도 가격이 비싸 향료를 화폐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향수 브랜드 ‘산타마리아노벨라’도 왕족의 향수였다.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역사는 1221년 약초를 연구하던 도미니크 수도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533년 도미니크 수도원을 후원하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리나 공주가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할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향수를 만들었다. 이름은 ‘콜로니아의 물(Acqua di colonia)’. 공주는 향수를 혼수로 가져가 지인과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이 향수는 프랑스 왕실에서 ‘왕비의 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훗날 콜로니아의 물은 향수를 지칭하는 프랑스어 ‘오 데 콜론(Eau de cologne)’의 어원이 됐다. 지금도 피렌체 본점에 가면 800년 전통의 향수 제조 공간을 볼 수 있다.

니치 향수, 나만의 예술작품으로

향수는 19세기 산업화와 함께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화학합성 향료가 개발되면서 향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됐다. 디올,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가 앞다퉈 향수를 내놓은 게 이때부터다. 샤넬의 전설적인 황금빛 향수 ‘넘버 5’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세기의 스타 마릴린 먼로가 ‘침대에서 잠옷 대신 샤넬 넘버 5를 입고 잔다’고 말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 들어선 희소성 있는 프리미엄 니치 향수의 시대가 열렸다. 프레데릭 말, 딥티크, 르 라보, 바이레도 등 니치 향수는 대중적인 향 대신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향을 내세운다. 이들에게 향수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브랜드 철학 등 스토리가 담겨 있는 ‘예술작품’이다.

이선아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