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山居(산거), 李仁老(이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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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공방(漢詩工房)] 山居(산거), 李仁老(이인로)](http://img.wvnryckg.shop/photo/202504/0Q.40278216.1.jpg)
![[한시공방(漢詩工房)] 山居(산거), 李仁老(이인로)](http://img.wvnryckg.shop/photo/202504/0Q.40287069.1.jpg)
[원시]
山居(산거)
李仁老(이인로)
春去花猶在(춘거화유재)
天晴谷自陰(천청곡자음)
杜鵑啼白晝(두견제백주)
始覺卜居深(시각복거심)
[주석]
* 山居(산거) : 산속의 처소.
* 李仁老(이인로) :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의 학자로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뜬 문사들의 모임인 죽림고회(竹林高會), 곧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쌍명재집(雙明齋集)』이 있었다고 하나 실전되었으며, 저서로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詩話集)인 『파한집(破閑集)』이 전해지고 있다.
* 春去(춘거) : 봄이 가다. / 花(화) : 꽃. / 猶(유) : 오히려, 여전히. / 在(재) : ~이 있다.
* 天晴(천청) : 날이 맑다. / 谷(곡) : 골짝, 골짜기. / 自(자) : 절로, 저절로. / 陰(음) : 그늘, 그늘이 지다, 어둑해지다.
* 杜鵑(두견) : 옛날에 촉제(蜀帝) 두우(杜宇)가 원통하게 죽어서 변화했다는 새 이름인 자규(子規)의 이칭인데, 이 새는 특히 봄철이면 밤낮으로 피눈물이 흐를 때까지 슬피 운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뻐꾸기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지만 이 시에서는 명백하게 소쩍새라는 뜻으로 쓰였다. / 啼(제) : 울다. / 白晝(백주) : 대낮.
* 始(시) : 비로소, 처음으로. / 覺(각) : ~을 깨닫다, ~을 알다. / 卜居深(복거심) : 사는 곳이 깊숙하다. ‘卜居’는 길흉을 점쳐 정해서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번역]
산속의 처소
봄은 갔어도 꽃은 여전히 피어있고
날은 맑은데 골짝은 절로 어둑하네
소쩍새가 대낮에도 울어
사는 곳이 깊숙함을 비로소 알았네
[한역노트]
역자는 학창시절에 이인로(李仁老:1152~1220) 선생의 이 시를, 별도로 곁들여진 설명 없이 고려시대 한시(漢詩)의 하나로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그저 한 지식인의 은자적(隱者的)인 풍모를 보여주는 일종의 풍류시 정도로 이해해 왔다. 그러다가 이번에 칼럼을 준비하면서 이 시가 언제 어디서 지어졌는가 하는 가장 기초적인 조사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을 마주하고 역자는 홀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작품이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서 왜 지어졌는가를 알지 못해도 그 작품을 이해하는 데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어떤 작품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 가운데 특정 사항을 놓쳐버린다면 작품을 오해하거나 곡해해버릴 위험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역자가 오늘 소개한 이 시는 이인로 선생이 경북 경산(慶山)에 있는,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고 설총(薛聰)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 반룡사(盤龍寺)에 머물 적에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머문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속시원하게 밝혀진 바가 없는 듯하다. 더욱이 시인이 그 당시에 승려의 신분이었는지 민간인의 신분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많은 이들의 추정처럼 이때는 서슬푸른 무신정권의 전횡으로 인해 시인이 실의(失意)한 시기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를 단순히 은자의 유유자적함을 노래한 풍류시로 간주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제1구의 ‘春去’, 곧 봄이 갔다는 것은 절기상 봄이 지나갔다는 얘기이므로 이 시는 적어도 여름 절기의 시작이 되는 입하(立夏) 이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절기상의 봄은 갔는데 봄꽃은 여전히 피어있다면 지나간 계절이 아직도 머물고 있다는 뜻이 된다. 사찰 경내에 있었을 ‘산속의 처소’에 이처럼 계절이 더디 가는 이유는 제2구 및 제3구의 원인과 함께 제4구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제2구에서 얘기한 ‘天晴’, 곧 날이 맑다는 것은 비가 오지도 않고 구름이 끼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늘의 햇빛이 무엇인가에 의해 가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날이 맑은데도 골짜기가 저절로 어둑해졌다는 것은 산그늘과 울창한 수목 등으로 인해 골짜기 안이 어둑해질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어둑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어지는 제3구의 언급에서 확인된다. 소쩍새는 본래 밤에 우는 새인데 처소 주변이 어둑해서 새가 밤인 줄로 착각을 하여 급기야 대낮인데도 울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러한 과장은 예로부터 수사(修辭) 기법의 하나로 널리 활용되었던 것이므로 멋들어진 문학적 과장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제1구에서 시인이 목도한 처소 주변의 ‘객관적인 사실’과 제2구 및 제3구에서 시인이 언급한 ‘주관적인 인식’의 공통된 원인은 제4구의 마지막 세 글자인 ‘卜居深’으로 귀결된다. 사는 처소가 산속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제1구에서 제3구까지의 설정이 비로소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 ‘卜居深’의 ‘深’은 시인 자신의 몸 역시 산속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이므로,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은연중에 얘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문인들에게 더없이 가혹했던 무신정권 시기를 겪느라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비애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깊이를 더하게 된 것이 어찌 산속의 처소뿐이었으랴! 자신의 포한(抱恨) 또한 그만큼 깊이를 더했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듯하다. 이 시가 지어질 당시의 상황을 최소한이라도 짐작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이러한 추론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인로 선생의 시에 이어 함께 감상하면 재미가 한결 쏠쏠할 당시(唐詩) 하나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와 더불어 당나라의 대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大林寺桃花(대림사도화)[대림사 복사꽃]」라는 제목의 시인데, 이를 통해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봄이 더디 오고 더디 간다는 상식을 옛사람들이 얼마나 재치있게 시화(詩化)시켰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人間四月芳菲盡(인간사월방비진)
山寺桃花始盛開(산사도화시성개)
長恨春歸無覓處(장한춘귀무멱처)
不知轉入此中來(부지전입차중래)
인간 세상 사월에는
꽃들 다 져버렸는데
산사에는 복사꽃이
비로소 활짝 피었네
봄이 돌아가 찾을 곳 없어
무던히도 아쉬워했는데
내가 몰랐던 게지,
봄이 여기로 들어왔던 걸
오늘 소개한 이인로 선생의 시는 오언절구로 압운자는 ‘陰(음)’과 ‘深(심)’이다.
2025. 4. 29.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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