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알마티무역관 관장
김정훈 알마티무역관 관장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이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을 통칭)에 대한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한국 기업들에게 중앙아시아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앙아시아 5개국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약 8000만명의 내수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물류 거점에 위치했다. 그간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왔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새로운 중앙아시아’를 만들려는 자체적인 노력과 맞물려 지정학적 ‘리스크 헷징(위험 회피)’을 위한 새로운 대안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는 구소련식 잔재가 남아있는 복잡한 행정 절차, 언어 장벽,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야하는 결코 쉬운 시장은 아니다. 이러한 도전 속에서 약 30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 사회는 현지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 기업들에게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핵심 파트너다.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극동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고려인은 이제 중앙아시아에서 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약 11만 명, 우즈베키스탄에는 약 17만 명, 키르기스스탄을 포함한 기타 지역에도 수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

지난해 카자흐스탄 포브스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부자 1위는 카스피 은행의 김 베체슬라브 회장이었다. 상위 50명엔 7명의 고려인이 이름을 올렸다. 고려인의 인구비중이 0.6%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작년에 고려인 하원의원 2명이 당선됐다.

고려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이들은 한국식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이 현지 시장에 적응하는 데 중간 교량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난해 중앙아시아에 최초로 진출한 편의점 CU의 현지 파트너는 중앙아시아 최대 아이스크림 제조사인 신라인이었다. 고려인 2세가 운영하는 회사다. 약 20년 전 한국의 유휴 설비를 수입해 최초로 한국식 아이스크림을 제조했고 소매유통, 의료 등의 분야까지 한국 기업들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중앙아시아 소비자들은 K-푸드와 K-뷰티 등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한국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 고려인 기업들의 참여는 한국 제품의 현지 마케팅과 유통 분야 협력에 새로운 도약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은 축적된 자본력과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시장 변화에 선제적 대응을 위해 미래 먹거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추진하고 있는 알라타우 신도시 프로젝트는 약 1500억달러의 대규모 투자 유치를 통해 관광, 산업, 교육, 금융 등 4개 지구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국가 특별경제구역으로도 지정됐다. 이 프로젝트의 개발 시행 총괄사는 고려인 전 상원의원이 운영하는 카스피안 그룹이다.

공급망 재편과 관세 전쟁이라는 큰 변화 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중앙아시아 개척을 위한 과제는 결국 ‘누구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변화에 고려인 비즈니스 네트워크와 협업을 통한 선제적 대응이 우리 기업들에게 단순한 위기 돌파구가 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성장 엔진이 될 것을 기대한다.